고향 까마귀
고향 까마귀
  • 이동희
  • 승인 2017.11.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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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있다.

 유목민처럼 풀밭을 찾아 가축을 몰고 떠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와 달리, 농경민족은 한곳에 붙박여 살아야 하니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유목민족이나 농경민족이나,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동양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태어나 자라면서 온갖 삶의 애환이 깃든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제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나쳐 남의 고향을 헐뜯고 근거 없이 폄훼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각한 갈등을 불러오는 요인이다. 나에게 고향이 있다면 다른 이에게도 고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나의 고향이 소중하다면 다른 이의 고향도 소중하다는 생각과 짝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엇박자를 이룰 때 애향심은 곧바로 배타적 탐욕과 비이성적 폭력으로 남의 고향을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 사회에는 ‘지역감정-지역차별’이라는 말이 상존한다. 현대사의 질곡을 건너오면서 이런 현상은 곁가지를 치고 증식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지고 말았다. 그중에서 호남과 영남 사이의 골은 깊게 파였다. 이런 현실이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고야 만다. 그리하여 지역정서를 부추기는 세력들이 배타적 독선과 독점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만들어 낸 비뚤어진 사고의 틀에 온 국민이 갇힌 꼴이 되었다.

 이런 폐해로 인하여 일방적 피해를 입는 쪽은 언제나 호남이었으며, 그 상대역은 언제나 영남이었다. 그래서 지역감정-지역차별에 관한 한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다. 이렇게 비뚤어진 지역정서는 온 나라-온 국민의 폐부에 깊이 내재하여 내홍(內訌-집안싸움)의 원인이 된 지 오래다. 이로 말미암아 치르게 될 국력의 낭비와 국론의 분열은 물론 국민 편 가르기의 양상은 나라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근거 없는 지역감정-지역차별을 금기시하고, 어떻게 하든 국민통합을 이루자는 것이 건강한 여론의 흐름으로 인정됐다. 그런 대세는 정치권에서 앞장서 왔던 것도 사실이며,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나,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국적 지역감정-차별의 불식’을 드러내어 밝혀왔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일국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현직에 있을 때 새로 선발해야 할 군무원을 “내 사람[우리 편]만 뽑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국방장관이 ‘내 편[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호남인을 철저히 배척했다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MB정권이 역사의 수레바퀴만 거꾸로 돌린 줄 알았더니, 인간의 이성마저 망가뜨린 반인륜적 악의 집단이었음을 확인하는 일은 분노를 넘어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부당한 지역감정을 치유하고 바람직한 국가 건설에 앞장서야 할 국방장관[김관진]의 출신지역이 ‘전북 전주시(Daum 인물 프로필)’로 기재된 것을 보고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에게는 ‘고향 까마귀’도 반갑지 않았을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그 알량한 권력의 맛에 도취되어, 또는 그 권력의 하수인을 자임한 그에게 ‘고향 까마귀’가 반갑기는커녕 귀찮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느 미국 작가의 소설 중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절을 자전적으로 탐구한 소설이지만, 그 제목만으로 보자면 딱 김 장관에게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은 잃어버린 고향이다. 고향을 잃은 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권력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 명예를 잃어서다. 권력의 정점에서 고향 까마귀를 박대했던 사람이 무슨 낯으로 고향을 찾을 것인가? 그는 이미 고향 전라도를 버렸는지도 모른다.

 “계집애야 계집애야/ 고향에 살지.// 멈둘레 꽃피는/ 고향에 살지.// 질갱이 풀 뜯어/ 신 삼어 신고,// 시누대 밭머리에서/ 먼 산 바래고,// 서러워도 서러워도/ 고향에 살지.”(서정주의 시「고향에 살자」전문) 굳이 이렇게 살자고는 하지 않겠다. 타지에서는 ‘민들레’라 부를 때, ‘멈둘레’라 불러도 흉이 되지 않는 곳에서, 까마귀 울음소리에서도 고향의 울음을 새겨들으며 살자는 것이다. 그래봤자 ‘인생행락백년’이 아니겠는가!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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