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인, 프레드릭 프랑수와 쇼팽
피아노의 시인, 프레드릭 프랑수와 쇼팽
  • 이봉기
  • 승인 2017.11.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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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음악사학자는 보기 드문 선율적 재능과 놀랍고 복된 화성 조직의 확장이 단연 돋보였던 이 사람을 최상의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다.” 피아노 거장 프란츠 리스트가 39세 나이에 요절한 절친을 회상하며 쓴 프레드릭 쇼팽 전기 <내 친구 쇼팽>의 서문 속 한 구절이다.  

 쇼팽은 리스트와 동시대 음악가로 당시 예술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렸던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약 200여개에 이르는 피아노곡으로 유명하다. 더불어 전주곡, 마주르카, 폴로네즈, 연습곡, 야상곡, 왈츠 등 낭만파적 소품이 각별히 많은 점이 특징이다. 그의 성품은 섬세하고 신중하며 내성적이었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렬한 애국 정신으로 조국을 그리워하며 폴란드 민요나 춤곡의 멜로디를 피아노 건반에 녹여 자신 작품 속에 스며들게 한 열정적인 피아노의 시인이기도 했다. 쇼팽의 곡에는 항상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는 음악적으로 낭만주의를 추구했지만 낭만적인 치장보다는 고전적 순수함에 더 다아갔다. 다만 협주곡에서 보여줄 수 있는 관현악 파트의 피아노를 관현악과 대등한 위치가 아닌 그저 반주로 생각하고 작곡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이기에 많은 음악 전문가나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아울러 그는 피아노 소곡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형식으로 승화시켰으며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기도하다.

 필자가 처음 쇼팽의 곡을 접한 건 왈츠로, 중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그 시기는 악보 구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다행히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누님의 도움으로 본인은 어려움 없이 악보를 구할 수 있었다. 왈츠는 듣기는 쉽고 아름다웠으나 시작부터 까다로운 곡이었다. 가슴을 울리는 환희와 춤곡의 가벼움이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버무러져 다가왔으며 리듬, 악상,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간 접했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색채의 매혹적인 음악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경함 때문인지 쇼팽 곡 레슨 기간 동안은 유독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본격적으로 쇼팽 곡에 집중했던 시기는 고등학교쯤이었다. 수준 높은 발라드, 스케르초(해학곡), 환상곡 등을 익히면서 다른 작곡가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쇼팽 특유의 음악 색채와 리듬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필자의 유학생활에서 시작한 쇼팽 연습곡에 피아노의 기교가 모두 다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쇼팽음악 탐구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결국 세종문화회관에서 피아노 연습곡 전곡(24곡)을 한국에서 초연했다. 그날, 5번의 커튼콜과 기립박수는 필자의 연주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 쇼팽과 함께 동거했던 조르주 상드는 쇼팽이 소개될 때마다 가십거리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쇼팽보다 6살 연상인 상드는 19세기를 풍미했던 여류 소설가이자 극작가, 수필가이다. 그녀는 쇼팽을 특별한 정신세계로 인도하며 그의 예술혼에 불을 지펴주었다. 특히 상드와의 사랑이 절정이었을 때 작곡한 24개의 전주곡은 지금까지 영원한 명곡으로 남아있다. 물론 쇼팽의 걸작인 ‘빗방울 전주곡’이라는 부제의 곡〈전주곡 Op. 28-15〉도 이때 만든 곡이다.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에 39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본인 또한 앞으로 언제까지일지는 기약할 수 없으나 숨쉬고 살아가는 동안 쇼팽이 피아노만 사랑하며 살아온 것 처럼 나역시 피아노에 정진하며 연주하고 살기를 희망한다.

이봉기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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