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자 바위였던 혁명전사, 화암 정현섭(1896~1981)
꽃이자 바위였던 혁명전사, 화암 정현섭(1896~1981)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7.08.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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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항일운동가의 삶

 지금도 그렇지만 1920년대 초 중국 상해는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계지’라는 이름으로 상해를 갈기갈기 찢어 나누어 가졌다. 그 땅에서 중국인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었다. 상해는 ‘제국의 시대’에 열강에 의해 분점된 비유럽권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그야말로 제국주의 열강의 욕망이 가감없이 투영되는 장소였다. 상해는 반식민지 국가 중국의 심장부에 들어선 식민도시였다. 이곳 상해에는 주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격살하려 육삼정의거를 기획했던 전북(김제) 출신의 항일운동가 화암 정현섭(1896~1981)이 중심에 있었다.

 #. 상해의 젊은 그들

 상해는 혁명의 도시였다. 중국의 혁명을 꿈꾸던 젊은 사회주의들은 상해에 모여 중국공산당을 조직했다. 여전히 스스로 공산주의국가임을 자임하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상해는 성지(聖地)이다. 착취와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바라던 아나키스트들도 상해로 모여들었다.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을 활용해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가들에게도 상해는 활동을 위한 최적지였다.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심훈의 ‘박군의 얼굴’에 소개된 일부다.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청년들이 이곳에서 청춘의 피를 뿌렸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자리잡은 이유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시종일관 외교론이 주류였다. 하지만 상해에는 외교론이 아닌 직접행동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던 이들도 있었다. 영화 ‘암살’과 ‘밀정’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밀양 사람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이 대표적이다. 해주 사람 김구는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애국단’을 조직했고, 서울 사람 이봉창과 홍성 사람 윤봉길은 자신의 몸을 조국 독립의 제단에 바쳤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의열단, 애국단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단체가 있다. 상해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이 그것이다. 아나키즘운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다. 홍구공원 의거를 모의했고, 주(駐)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격살하려 했던 육삼정의거를 기획했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중심에는 정읍 사람 백정기와 함께 오늘의 주인공 김제 사람 정현섭이 있었다. 

 #. 30여년 타국서 항일투쟁 펼쳐·

 정현섭의 호는 ‘화암(華岩)’이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계속했던 그를 동지들은 ‘화암’으로 불렀다. 그는 호 그대로 바위같은 사람이었다. 화암은 1896년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장화리에서 태어났다. 외조부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여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할 때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 부정부패가 가득 찬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던 외조부의 희망과 의지가 화암에게 전승되었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반골정신이 강했다.

 1919년 화암의 삶의 방향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종의 인산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서울에 갔던 화암은 위대한 3·1 민중봉기를 목격했다. 이에 각성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20년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하자, 일본의 침략상과 일제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벌였다. 이 활동 때문에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북경을 거쳐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던 화암은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1923년 8월 일제의 감시를 뚫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25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화암, 중국 대륙을 누비다

 북경에 정착한 화암은 1924년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등과 함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설립했다. 이후 화암은 조국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염원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길을 올곧게 걸어갔다. 그는 독립운동의 이론적 정립을 위하여 기관지인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했다.

 화암의 활동공간은 북경과 천진, 상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30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김좌진 피살 이후 북만주의 운동을 돕기 위해 화암은 동지들과 함께 북만주로 파견, 북만주 해림으로 건너간 화암은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침략을 획책하던 일제가 북만주 일대에 대수색작전을 벌이자 부득이하게 상해로 귀환했다.

 상해로 귀환한 화암과 동지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설립했다. 연맹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을 해방시킨 후 아나키즘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31년 11월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본영사관과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했다. 1933년 3월 중순 화암은 주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라키(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들을 고급 요정 육삼정(六三亭)으로 초청해 연해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리요시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밀고로 실패했다. 1936년에는 호서은행에서 탈취한 5만 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화암은 복건성과 상해를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포로수용소 소재지를 정탐해 미국 공군에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을 했으며,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을 탈출시켜 임시정부로 보내는 공작도 전개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화암은 상해거류민단장, 인성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포의 구제와 교육에 주력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상해에 ‘조선학전관’과 ‘신채호학사’를 설립해 한국학 연구의 길을 텄다. 해방 이후 전개된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자 화암은 대만을 거쳐 홍콩으로 옮겨갔다가 1954년에야 마침내 귀국했다. 

 #. 해방 후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

 1921년에 망명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화암은 많은 동지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처음으로 국경을 함께 넘었던 이종락을 비롯해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만들었던 이정규, 이을규 형제는 차례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옥고를 치뤘다.

 화암의 동지이자 스승인 우당 이회영은 1932년 11월 일제가 점령한 만주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러 가던 중 대련에서내부 밀고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6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자 화암은 비밀리에 조사를 통해 밀고자를 처단하기도 했다.

 화암은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꿈꾸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좌우의 대립 속에 조국은 분단되었다. 분단된 조국의 남쪽과 북쪽에는 나란히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화암의 투쟁은 멈출 수 없었다. 화암은 다시 이승만의 독재에 맞선 싸움을 시작했다. 4.19혁명을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노(老)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감옥에서 나온 화암은 3선개헌과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하다 1981년 10월 21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해다.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후에야 대한민국 정부는 화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착취와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바라던 화암의 꿈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기획취재팀

 특별자문=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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