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과 초의(草衣)의 인연
다산(茶山)과 초의(草衣)의 인연
  • 이창숙
  • 승인 2017.08.0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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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11>
 역사를 알아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과거와는 다른 무엇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좀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이다. 현재 계승되고 있는 전통문화의 경우 한 시기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차 문화의 양상은 대부분 조선후기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조선후기 일부 지식인들은 자신 주변의 문화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역사·문화·지리·문물 등 정보를 종합적으로 집대성하는 등 실생활에 유익한 백과 사전류가 활발하게 편찬된다. 당시 저술된 것 중 차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 芝峯類設』 권19「植物部 식물부」;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星湖僿設』 권6 「만물지 萬物門 」 차식(茶食), 권12 「인사문 人事門」 차시(茶詩); 서유구(1764-1845)의 「만학지 晩學志」권5 잡식(雜植);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권56 「도다변증설」등이 있다. 차의 고사(古事)와 차세제도(茶稅制度), 차의 효능, 다탕법(茶湯法), 차나무 재배(栽培) 등이 꽤 상세하다. 한국과 중국의 차사(茶史)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빙허각 이씨가 엮은(1809) 여성 생활백과 『규합총서 閨閤叢書 』에는 대용차와 차를 약용과 실용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실용서는 차가 민간문화로 인식되는 기틀이 되었으며 문예 운동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다경』으로 불리는 초의(1786~1866)의 『동다송』(1837년) 또한 조선 후기 류서류(類書類) 편찬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사찰과 귀족 중심의 차는 조선의 숭유억불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고려와는 다른 사원(寺院)의 음다풍을 형성했다. 중국을 출입하는 문사들 사이에 중국차의 음용이 더욱 활발해지기도 하지만 조선의 차에 대한 애호층이 형성된다. 조선 후기 유배지를 중심으로 초의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문사들에 의해 음다문화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한국 음다문화의 기틀을 형성하게 된다.

  초의와 사대부들과의 인연은 대둔사(大芚寺)에서 시작된다. 1809년 초의는 대둔사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의 소개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만난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초의가 “다산을 따라 유서(儒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를 배웠다”고 하였다. 당시 불가(佛家)의 승려와 유가(儒家)의 문사들 사이에는 교류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초의가 쓴 「상정승지서 上丁承旨書」에 다산 정약용과 교유를 원하는 초의의 심정이 간절하게 드러난다. 아래 글은 초의가 다산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왕래를 하지 않아 마음이 거칠어졌다는 다산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글이다. 다산을 스승으로 표현한 초의의 심경과 당시 불가(佛家)와 유가(儒家)사이의 경계가 잘 나타나있다.

 
  “근자에 어떤 요망한 산승(山僧)이, 혹 제가 송암(松庵)에 머물고 있는 동안 유림(儒林)으로 돌아설 조짐이 있다고 떠들어대어, 그 말이 은사 스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은사 스님도 덩달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말 때문에 스승님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되어 왕래가 드물어 마음속이 거칠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모실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의는 다산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문사들과 시회나 서신을 통해 활발한 교유를 하게 된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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