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희망을 꿈꾼 사회주의자 김철수(1893~1986)
조국의 희망을 꿈꾼 사회주의자 김철수(1893~1986)
  • 기획취재팀
  • 승인 2017.08.0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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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항일운동가 魂 되살린다> 1부-항일운동가의 삶 (6)
▲ 독립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

 대한민국 항일운동사를 보면 ‘김철수’라는 이름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13년8개월간 옥고를 치를 만큼 불굴의 독립투쟁을 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공안당국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사후 20년 만인 2005년에야 조국은 그에게 ‘독립유공자’로 칭호를 서훈했다.


 김철수에 대한 평가는 전통유학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전통유학과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한국사회주의 사상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한학자 서택환을 만나면서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1893~1986)는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쌀 위탁 판매업을 하는 넉넉한 소지주였고 재주가 있는 아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당시 이평면 말목에는 구례군수를 지내다 부모 상(喪)을 당해 군수직을 사직한 서택환이 서당을 열고 있었다. 김철수는 그를 통해 한국의 선비정신을 배우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서택환은 한일병탄(한일합병과 같은 뜻이지만 병탄은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자기 것으로 만듦’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한일합병보다 더 일본의 침략적인 모습을 보여줌)되기 2,3년 전에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앞줄 왼쪽에서 4번째)
   김철수는 화호보통학교와 군산 금호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과 전문부에 입학했다. 1914년에는 친구 7명과 함께 사진을 찍고서 ‘곡귀단(哭鬼團)’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더라도 귀신이 되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울자’는 뜻이다.
 
▲ 부안 백산고 입구에 조성된 지운 김철수 선생의 공적공원

 #. 국내 사회주의 운동 주도

 1915년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첫 비밀결사인 ‘열지동맹’을 결성해 장래 사방으로 흩어져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그 뒤 두 번째 비밀 결사 ‘신아동맹단’을 결성해 중국, 조선, 대만의 동지들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연대투쟁을 벌일 것을 선언했다.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김철수는 식민지 시대에 겪는 고통의 근원을 ‘일제의 강점(强占)’ 때문이라고 인식해 민족의 독립에 온 힘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귀국 후 1920년에는 최린의 집에 모여 최팔용, 이봉수, 주종건, 최혁, 장덕수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선결문제이므로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나가야 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길러서 사회주의 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사회주의운동 사상 최초의 결사였다. 사회혁명당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 세력인 한인사회당과 조직적으로 결합해 ‘고려공산당’을 1921년에 창립해 1923년초까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을 소위 ‘상해파’라 부른다.
 

▲ 김철수 재판을 다룬 신문기사와 판결문

 #. 조선공산당 책임자가 되다

 김철수는 자신이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천성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고, 특히 걸인이나 어려운 자들을 보면 도와주는 집안 고모의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성향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해방과 가난한 자들의 계급해방을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자 국내에 들어온 김철수와 친구 이봉수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6·10만세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조선공산당이 와해되자 이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김철수가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취임했다. 일본 경찰이 김철수의 조선공산당을 ‘3차 공산당’이라고 보는 것은 경찰이 조선에서 공산당을 발본색원했다고 주장하며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김철수를 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불리는 것 또한 잘못이다. 김철수가 복원한 공산당은 1925년 4월에 창립한 조선공산당 자체였다.

 김철수가 모스크바로 파견되어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승인을 받고 돌아왔지만, ML파(막스 레닌의 첫글자 이니설을 딴 것으로 해방전 또는 광복전, 한국 공산당의 한 파벌)의 파당성과 전횡이 알려지면서 당을 해체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김철수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략으로 공산당 활동을 한 것이다.

 위험한 일을 맡아 운동의 전위에 서서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김철수는 1930년에 검거되어 형을 선고받는다. 항소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에서였다.
 

▲ 1938년 공주감옥 출소 후 모습(앞줄 왼쪽에서 3번째)

 #. 진정한 해방을 위한 모색

 해방 후에 공주감옥에서 출옥한 김철수는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되었다’고 주장하며 외세의 관여를 배격했다. 김철수는 “민족주의자들도 통일이 필요하고, 공산주의자들도 통일해야 되고, 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통일이 되어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정치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낭만적인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 정치에 손을 떼고 1947년에 고향 백산면 원천리에 돌아와서는 오직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김철수는 이때부터 ‘자연인 김철수는 살고 정치인 김철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 김철수 의사가 살았던 토담집 이안실(易安室. 이 정도면 편하다는 의미)

 #. 손수 지은 ‘이안실’은 외로운 터

 백산면 대수리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 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외딴집은 김철수가 손수 지은 것이다. 이 집에 살면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자신의 토담집을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불렀다.

 김철수는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 하나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또 민족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의 1주기에 세운 비석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백비’다. 평가를 미룬 것은 남과 북이 통일이 돼야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2005년 광복 60주년에 김철수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의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은 우파 독립운동가의 활동만 배워온 우리들에게 비로소 반대쪽의 독립운동사도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부안 백산고 교문 입구에 조성된 지운 김철수 선생 공적공원 내 있는 백비(사회주의자란 사상적 문제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훗날 남북통일 후 공적을 재평가해 묘비 뒷면을 기록하기 위해 비워놓음)

 #. 독립운동가 김철수 구국정신 복원

 갈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면서 김철수의 이름도 ‘망각의 늪’ 속에 갇히게 되었다. 본보는 일생을 독립을 위해 바친 김철수를 끌어내어 ‘기억의 역사’로 다듬고 알릴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기획취재팀은 이생에서 춥고 초라하고 외롭게 살다 가신 ‘독립운동가 김철수’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고, 정의에 빛을 더하는 작은 출발이라는 각오로 그의 발자취를 뒤따랐다.
 

▲ 김철수 묘비 앞 부문(2005년 독립운동가로 서훈돼 대전 현충원으로 안장되면서 묘비는 이곳으로 이전 설치됨)
   <기획취재팀> 특별자문=정재철 부안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기획취재팀> ▲한성천 부국장(팀장) ▲신상기 사진부장 ▲이정민 기자 ▲김기주 기자
 <자문기관> ▲광복회 전북지부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K-history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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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현 2017-10-31 03:57:17
정읍 백산이 아니라 부안 백산입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