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도(王都)에 서다
백제 왕도(王都)에 서다
  • 김철모
  • 승인 2017.07.20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뭘 안고 가다’ 1400년전 국경을 초월한 이 사랑은 지금도 익산 왕궁 후원에 넘쳐흐르네. 우리의 사랑이 어찌 여기에 비길 것이며, 우리가 나눈 정이 어찌 여기에 견줄 것인가, 사랑의 꽃이 세월 속 왕궁에 잠들다. 익산시대에 서서히 다시 꽃이 피어나니, 서동 선화 사랑이 어찌 숭고하지 않을 것이며, 세게 문화유산 왕도(王都)가 도도하지 않을 것이며, 식품 수도 그 맛에 반하지 않을 것이며, 물류의 중심 그 피가 흐르지 않을 것이며, 어찌 보석의 도시 그 보물이 빛나지 아니할까, 백제 왕도의 새 역사를 쓰는 날 살맛나고 품격이 있는 고장 익산은 오늘에 다시 피어나 자손만대에 영원히 번창 하리라.

 이 시는 필자가 익산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지은 첫 자작시 ‘백제 왕도에 서다’ 라는 시다.

 그간 전북 도청에서 29년을 근무하면서 간접적으로 알았던 익산은 그간 보아왔던 것과는 달리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였다.

 첫째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의 백제왕궁을 비롯하여 무왕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과 제석사지, 미륵산성 등 다수의 백제유적이 산재하는 역사문화자산의 보고이다.

 두 번째는 1단계 조성이 마무리되는 국가식품클러스터와 3산단, 4산단의 기업 입주를 서두르고 있고 하루 KTX 등 220여회의 열차가 통과하고 있는 물류중심은 산업발전의 보고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다 폭풍우를 만나 고국 조선에 첫발을 내딛었던 곳이었던 나바위 성지를 비롯하여 전통 장맛을 자랑하는 고스락, 국내 유일의 교도소 세트장, 함라 3부잣집, 진귀한 보석이 가득한 보석 박물관 또한 우리익산의 숨은 보석들이다.

 익산의 역사는 고조선 준왕의 남천지를 시작으로 마한시대 건마국, 백제시대 금마저에 이어 고려시대 익주, 조선시대 익산군 그리고 근대에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시·군이 통합되면서 오늘날 익산시로 변모해 왔다. 이런 와중에 익산의 근대화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의 아픈 상처는 익산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제 익산이 백제 왕도로서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백제 무왕(재위 600∼641)때 조성된 왕궁의 궁궐담장과 정원인 후원영역을 이번에 공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궁궐담장은 동서로 230미터, 남북으로 495미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7개의 문지와 수구, 암거배수로 등이 있다. 왕궁 내 동북편의 자연구릉을 활용한 후원은 485미터의 대형수로가 크게 ‘U’자 형태를 그리며 동?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 6개의 곡수로와 4개의 집수시설은 효율적인 물의 저장과 배수, 조경 등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원의 네모난 연못과 구불구불한 물길을 화려한 정원석으로 꾸민 조경기법 등은 당나라와 일본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의 궁궐 정원에서도 엿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는 당시 백제인들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궁성 중 후원은 익산 왕궁리 유적이 유일하여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앞으로 그동안 잠들어 있던 보석들을 하나하나 실에 꿰는 일만 남았다.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우리 익산, 백제 왕도로서 다시 한 번 웅비하기 위해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김철모<익산부시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