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 대신 총을 든 아나키스트(Anarchist) 백정기 의사(1896~1934)
괭이 대신 총을 든 아나키스트(Anarchist) 백정기 의사(1896~1934)
  • 기획취재팀
  • 승인 2017.07.1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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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북 항일운동가의 혼 되살린다> 1부. 항일운동가의 삶 ④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전북출신 독립운동가인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중국 침략의 주범 중 하나인 주중 일본공사 처형에 나서기 전에 구국결의를 담은 말이다. 중국 상하이 육삼정 의거의 출사표이기도 하다.
 
▲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3의사 묘(왼쪽부터 안중근 의사의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주류는 ‘민족주의자’를 포함한 ‘아나키스트(Anarchist)’와 ‘사회주의자(Socialist)’들이었다. 백정기 의사는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는 독립운동가다. 그럼에도 그간 잘못된 인식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를 ‘공산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Anarchism)은, 원래 ‘무정부주의’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나키즘은 ‘정부가 없는 혼돈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원래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 따위를 배격한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사회 타도와 사유재산 제도 철폐, 무계급 착취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비슷하지만, 그 주요 목표를 자유에 대한 관심과 통치기구의 폐지를 촉진하는 데 둠으로써 독재를 용인하는 공산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
 

▲ 백정기 의사의 고택(정읍시 영원면)

 #. ‘천재소년 백정기’ 가슴에 항일의식 싹트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환경과는 달리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며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다.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할 정도로 영특했으며 서도(書道)에 있어서도 상당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였다.
 

▲ 백정기 의사가 한문을 공부했던 영주정사(등록문화제 제212호, 정읍시 흑암동)

 1910년(당시 15세) 합방 직후 영주정사(瀛州精舍, 정읍시 흑암동)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때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당시 호남의 명문가 자제들인 백관수(白寬洙, 당시 22세), 김성수(金性洙, 당시 20세) 들과 같이 공부하였다. 
 
▲ 창흥의숙(담양 창평초등학교의 전신)

 이후 창평의 ‘창흥의숙(昌興義塾, 창평초등학교 전신)’에서 송진우(宋鎭禹),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양태승(梁泰承, 무등양말 창업자)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한문과 국사, 영어와 일어, 산술 등의 교과를 배웠다. 이 교육기관의 설립자는 호남 근대교육의 창시자로 불리는 춘강(春江) 고정주(高鼎主)로 김성수의 장인이었다. 백정기 의사는 1919년 고향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1924년에는 일본에서 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였다.

 

▲ 체포 당시의 백정기 의사
  #. 국내서 자금 마련, 국외서 항일투쟁 전개하다

 백정기 의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염출할 목적으로 서류상 가공의 토지를 만들어 매매함으로써 당시 부안 백산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와카야마(若山)로부터 막대한 토지대금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  

 자금이 마련되자 백정기 의사는 1922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했다가 1923년 여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 그러나 동경대지진(關東大地震)로 인해 부득이 1924년 4월에 귀환하였다. 그가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제가 동경대지진을 계기로 사회주의를 박멸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 상하이에서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무련’)을 결성하는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다. 무련이 기관지를 발간한 것은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이 아나키스트였음을 세상에 드러낸 계기가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하이에서 ‘흑색공포단(BTP, Black Terrorist Party)’을 조직하고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흑색공포단은 이회영과 김제 출신 아나키스트 정화암(鄭華岩)이 지휘하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으나 아리요시 공사 암살음모 계획 직전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폭탄투척 사건 당시에 백정기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으나 안타깝게도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 상하이 ‘육삼정 의거’의 주역. 왼쪽부터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 사전 정보 누설로 ‘육삼정 의거’ 실패하다

 1933년 초 백정기 의사는 상하이에 있는 고급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 정계와 군사계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이 회합을 갖는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참석자 중에는 일본 육군대장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도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라키는 일본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 대신으로 일본 총리대신보다 더 실권이 있는 인물이었고, 아리요시 공사는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장본인이었다. 

 1933년 3월 백정기 의사는 상하이 훙커우에서 정화암(鄭賢燮)·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했으나 사전 정보 누설로 육삼정에서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4년 숨졌다. 그리고 29년이 지난 1963년 정부는 백정기 의사에게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육삼정 의거(1933)’는 의열단(義烈團)의 ‘황푸탄 의거(1923)’,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1932)’와 더불어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3대 의거’로 꼽힌다.

 

 기획취재팀

 특별자문=김재영((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문학박사)
 <기획취재팀> ▲한성천 부국장(팀장) ▲신상기 사진부장 ▲이정민 기자 ▲김기주 기자
 <자문기관> ▲광복회 전북지부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K-history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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