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날을 추앙하며
의병의 날을 추앙하며
  • 고재흠
  • 승인 2017.05.2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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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의병의 날을 맞았다. 의병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ㆍ애족 정신으로서 나라가 위급할 때, 민족과 국가수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국난극복의 싱징이다.

의병(義兵)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 동안 9백여 차례 이상의 외침을 당했으며, 그때마다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삼국시대에서 출발한 의병은 고려시대 대몽(對蒙)항전을 거쳐 임진왜란 때 절정을 이뤘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한제국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여러 방면에서 민족적 저항이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운동이 바로 의병전쟁이었다. 왜군과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왜군이 척결되고 다수의 의병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현대사회에서 만약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이 일어났을 때, 과연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 걸고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심해서 그럴 용기가 없다. 감히 생각도 미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고경명(高敬命)선생은 장남과 차남 형제를 불러놓고 가정과 학문도 중요하지만 국난을 막은 뒤에 챙겨야 한다며, 우리 모두 전장에 나아가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서자고 뜻을 모았다. 그런 내용의 격문(檄文)을 각 도에 돌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학자로서 여러 관직을 거쳐 퇴임한 신분으로 자식들까지 내세워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제봉 선생의 우국충정에 감동하여 각 도에서는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의병들은 고경명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고 장군은 의병 7천여 명을 거느리고 금산전투에서 혈전 끝에 두 아들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당시 동반 참전한 류팽노, 안영, 두 선생도 모두 순절하였다. 고경명 장군은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 두 아들과 류팽노, 안영 선생 5명 모두 문과에 급제한 문인이다. 사액사당인 광주 포충사에 5분이 배향되었다. 고경명 의병장의 가문에서는 당시 본인과 두 아들, 딸, 동생, 종제, 조카 등 12명이 목숨을 바쳤다. 한 가족이 그렇게 많이 희생된 것은 어디서 찾아볼 수 없는 대사건이다.

요즘 일부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본인이나 자식들이 군복무 미필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사례를 간혹 볼 수 있다. 고경명 장군의 호국사상과는 대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병 하면 먼저 떠오르는 분이 곽재우 홍의장군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붉은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여러 번 승리한 공로로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승리를 이룬 분은 당연 이순신 장군이다. 또한 호국불교 정신에 따라 승려들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의승병들의 공과가 크다. 그중 ‘유정 사명대사’는 의병 2천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임진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순국하신 분은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다. 그 중 영ㆍ호남지역에서 공헌하신 분으로 김천일, 김덕영, 김시민, 최익현, 백용성, 금산의 조헌 등의 의병장은 천추만대 추앙을 받을 것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애의 긍지를 심어주고, 숭고한 의병정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불굴의 도전정신을 심어줘야 한다. 6월1일 의병의 날 하루라도 의병의 사상을 재조명 하는 성심을 가졌으면 한다.

 고재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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