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역사 현장 관리 허술
3·1만세운동 역사 현장 관리 허술
  • 김기주 기자
  • 승인 2017.02.27 19: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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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 면모 찾아보기 어려워

남부시장에 설치된 3.1절 관련비가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김얼 기자

 일제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 벗어나 광복한 지 어느새 7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올해로 98주년 3.1절을 맞이하지만, 기념일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하는 가운데 상당수의 도민은 자칫 잊혀가는 공휴일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에 전주시내에서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섰던 애국선열들의 노력을 알아보고자 3.1절 관련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전주시 남부시장 매곡교 주차장 입구. 이곳에는 ‘3.1운동 발상지 비’가 초라하게 서 있다. 당시 구국일념으로 일제에 항거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던 전북도민들의 우렁찬 함성을 떠오르지 않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다. 수년간 노점상 사이에 방치되어 있다 보니 비의 글귀를 읽어야만 이곳이 3·1만세운동을 펼쳤던 역사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최근 들어서야 전주시에서 울타리를 설치했다. 지나가던 시민 도모(60) 씨는 “전주에 반평생 거주했지만, 시장 안에 3.1운동 관련한 비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며 “그전에는 노점상들에 싸여 보이지도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이 밖에도 전주에는 3.1만세운동 역사지가 있다.

▲ 3.1절을 이틀앞둔 27일 3.1관련 비석들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보수되어 있다./김얼 기자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신흥중·고등학교. 학교 정문에서는 3·1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지난 1919년 3월 13일 신흥학교 학생 및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당시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천주교 건너편에서 모여드는 군중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하고 오후 12시 20분께 남문 밖 시장 부근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진입했다. 이날은 장날로 남문 밖 장터(남부시장)는 김제와 남원, 고산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숨겨둔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고, 독립선언문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주의 만세운동은 이후에도 3개월 넘게 도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이를 주도한 당시 신흥학교 학생들은 고형진·남궁현·김병학·김점쇠·이기곤·김경신 등으로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고 갖은 고초를 당했다.

기소된 고형진 선생은 상고를 신청하며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 열망을 들어냈다.

그는 재판에서 상고이유를 “조선총독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칭해 조선민족을 압박하고 생살(生殺)을 임의로 했으며, 합병이 완성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극단적 무단정책으로 압박을 가한 것은 구한국시대 반상(班常)의 차별보다도 몇 배 높으니 신성한 조선민족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 3.1절을 이틀앞둔 27일 3.1관련 비석들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보수되어 있다./김얼 기자

 전주시 다가동 서문교회도 항일운동사적지로 전주시내에서 독립만세시위의 중심 역할을 한 역사지다. 당시 김인전 목사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임영신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 거사를 전해 듣고 1919년 3월 13일 전주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할 것을 결정했다.

그나마 이 두 곳은 신흥중·고와 서문교회에 있어 관리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편, 전주보훈지청에 따르면 전북지역 독립운동 관련 시설은 기념비 49곳, 생가·사당 15곳, 기념탑 10곳 등 모두 97곳에 달한다.

김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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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2017-02-28 13:06:53
정비좀 하소,,,노점이 장사를 하고 있어서 보이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