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감각의 역설(逆說)
시간감각의 역설(逆說)
  • 홍용웅
  • 승인 2017.01.04 1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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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많고 탈 많은 한해가 지나갔다. ‘비선 게이트’가 모든 걸 삼켜버렸다. 경제도, 민생도, 외교도, 문화도…. 그러나 ‘병신년’이 지나갔다는 실감은 아직 나지 않는다. 현재진행 중인 충격의 여진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지난해는 여느 해와 달리 유난히 길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왜 어떤 해는 허무하리만큼 짧게, 어떤 해는 지긋지긋하게 길게 느껴지는가? 같은 길이의 시간이라도 어떤 일은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반면, 어떤 일은 시간이 가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느끼는 의문으로 이른바 시간감각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독일 문호 토마스 만(Thomas Mann)이 〈마(魔)의 산〉이라는 소설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의 체험에 비춰보면 대체로 재미있는 일을 할 경우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반대로 단조롭고 지루한 일을 하면 시간이 가지 않는다. 즉 동일한 시간단위라 해도 흥미진진한 일에서는 시간이 짧다고 느끼는 반면, 무미건조한 일에선 시간이 길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시간단위를 크게 하여 예를 들어, 수십 년 단위로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정반대 결론이 도출된다.

내용 없이 반복되는 시간들은 그 당시는 더디게 가는 느낌을 주나, 오랜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기억조차 못 할 만큼 짧은 순간으로 졸아든다. 반대로 너무 재미있어 쏜살같이 지나버린 순간들은 후일, 슬로모션처럼 길고 깊게, 기억의 심연에 침전된다.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로운 일의 경우,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자면, “시간의 흐름에 폭, 무게 및 부피가 주어진다.” 그리하여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빈약한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대문호는 일갈한다.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이 낳은 시간의 병적인 단축현상이다.”

만약 평생을 매일매일 완전히 똑같은 일로 소일하게 되면 인생은 단 하루로 오그라든다. 하루살이마냥 인생은 부지불식간에 소멸하여 버린다. 독일 소설가는 결론 내린다. “익숙하다는 것은 시간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그 후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데 기인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물리적 시간보다 주관적인 시간이 중요하다. 35세에 요절한 모차르트의 주관적 수명은 얼마나 될까? 실험과 열정, 때론 광기로 넘친 그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도 모른다. 3세기를 격한 오늘에도 그가 남긴 600여 작품은 젊은 연주가들의 궁극이요, 노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니 단언컨대 그는 시간의 승리자다.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았든 새해엔 다시 시작해보자. 미지의 대륙이나 새로운 지식에 도전해 보자. 과거를 되돌아보는 갭이어(gap year)를 가져도 좋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제부턴 새롭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많이 창출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이 저절로 성사되진 않을 것이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성공한 삶이란 재미있는 순간들의 총화에 불과하다. 재미란 결국 새로움과 의미의 융합이 아니겠는가?

작년이 참담함과 황당함으로 가득한 한해였다면, 올해는 우리 모두 재미로 가득한 기나긴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홍용웅<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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