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송귀연 ‘비설거지’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송귀연 ‘비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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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2.2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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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빗사위다. 아침부터 매지구름이 덮인다 싶더니 흘레바람이 흙내를 들추며 문지방을 덮친다. 부리나케 장독으로 달려가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거둔다. 호박말랭이, 시래기타래도 정신없이 안고 뛴다. 열어젖혀둔 창문 틈이 생각나 후다닥 몸을 다시 일으킨다. 다행히 비는 틈새로 미처 발을 디밀진 않았다. 처마 밑에서 가만히 비를 긋고 바라보는데 아뿔싸! 마당 귀퉁이에 널어둔 버섯소쿠리가 눈에 띈다. 흥건히 젖어버린 버섯은 이미 축 늘어져 물먹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비가 오거나 오려고 할 때, 비를 맞혀서는 안 될 물건을 거둬들이거나 덮는 일이 비설거지다. 내가 사는 산골엔 자주 예기치 않은 비가 내려 당황하는 일이 많다. 비설거지처럼 농촌에서는 절기나 철마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부지기수다. 그 중에도 겨울나기는 꼼꼼히 챙겨야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음 해 농사가 거기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누릿해진 콩대는 낫으로 베어 방망이로 두들기거나 도리깨질을 해야 한다. 벼는 탈곡 후 나오는 짚을 따로 모아 둥글게 말아 흰 비닐을 씌워둔다. 소여물 마련하기며 들깨나 참깨를 한 아름씩 묶어 볕에서 말리는 일 등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엄마는 늘 비가 오기 전 미리 비설거지를 해서 낭패를 당하는 일이 없었다. 육칠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를 채근하여 집안구석구석을 점검하는 한편, 틈이 생긴 담장과 비가 새는 지붕, 얼룩진 벽지도 새로 발랐다. 가을이면 방구들과 굴뚝청소를 해서 고래에 불이 잘 들도록 했으며, 헌 이불은 솜을 새로 타서 이불갈이를 했다. 무엇보다 비가 올 땐 장독부터 먼저 덮었다. 고추장이며 된장, 간장 등 한 해의 먹거리가 고스란히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전원생활을 한지 삼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농사일이 서툴다. 봄이면 콩이며 고추 모종내기, 과수나무 가지치기, 여름엔 농약뿌리기, 가을걷이며, 겨울철 농한기활용까지. 나름 월력에 꼼꼼히 기록을 하며 동네어른들에게 미리 물어보기도 하지만 정작 닥치면 이런저런 일로 놓치기가 일쑤다. 늘 어떤 일을 사전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일이 닥쳐 허둥대기만 한다. 집안정리며 청소조차 날마다 하지 않고 미루는 편이다. 그러다 갑자기 손님이라도 오면 난감해진다. 자잘한 일의 순서를 대수롭지 않게 미루다 낭패를 당한 일이 부지기수다. 냉장고의 찬거리를 정리하지 않아 썩히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이나 식물들도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동물은 몸속에 영양을 비축하여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땅속이나 동굴 속에 웅크려 봄을 기다린다. 새들은 깃을 가볍게 하고 청설모는 부지런히 도토리를 모은다. 나무는 수분을 차단함으로써 생장을 멈춰 몸이 얼지 않도록 하여 겨울을 난다. 그것뿐이랴. 세차게 흐르던 강물도 몸집을 줄이고 산들도 두터운 낙엽이불을 꺼내 덮는다.

농가월령가는 다산의 아들인 정학유가 지은 전래적 노래책이다. 여기엔 농가의 행사와 세시풍속 뿐 아니라 농촌풍속과 권농(勸農)을 월별로 세밀하게 기록해두었다. 24절기는 농사를 준비하는데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입춘 때는 굿을 하고 농사의 기초인 보리뿌리를 뽑아 풍흉을 점쳤다. 경칩에는 일 년 동안의 빈대를 잡기 위해 흙담을 쌓거나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두기도 했으며, 망종 때는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의 씨를 뿌렸다. 처서엔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벌초를 했고 마지막 절기인 대한에는 콩을 땅이나 마루에 뿌려서 악귀를 쫓아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토록 유비무환으로 무장한 엄마였지만 가세가 기울어지려니 일련의 일들이 거푸 일어났다. 전문요리엔 문외한이었는데도 갈비 집을 차려 일 년을 못 버티고 폐업해야 했다. 부동산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이 덩치 큰 건물을 매입했다가 불어나는 빚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팔고 돌아서자 야속하게도 값이 껑충 뛰었다. 아무리 예지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살면서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그러지 못하는 게 더 많다.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더 신비로운 것이 아닐까.

여우비는 일을 배가시켰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겨우 비설거지를 끝내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 해가 났다. 그러면 다 치웠던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펴 널고 부산을 떨어야 했다. 아파트는 모든 물건들이 집안에 있어 비가와도 걱정이 없지만 농촌상황은 비만 떨어지면 비설거지로 콩을 볶게 된다. 갑작스런 비는 스님의 죽비처럼 나태한 일상을 깨운다. 그것은 한시도 삶에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어떤 경고 같은 것이다. 비설거지를 함으로써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하게 되고 그로인해 바쁜 농촌의 일들을 질서 있게 만드는 것이다.

비에 젖은 것들을 다시 내어 말리면서 삶의 밑바닥까지 내동댕이쳐졌던 그 옛날의 상황을 떠올린다. 엄마는 서로를 원망하며 해체직전까지 치달았던 가족들을 껴안으며 다독였다. 늘그막엔 공장일도 마다하지 않고 당신부터 솔선수범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뒤늦은 대처였지만 절망만 하고 재기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영영 일어서지 못하였을 것이다.

구름사이로 햇빛이 내려온다. 허둥지둥 거두어들었던 호박말랭이며 무시래기를 담은 소쿠리를 마당에 내어놓는다. 산골 오후는 한 차례의 야단법석이 지나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을 되찾는다. 뜻하지 않은 혼란과 그에 대한 대처와 회복,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것이 삶의 이치이다.

컹컹, 여우비가 꼬리를 흔들며 맞은 편 산을 넘어간다. 기지개를 켜는 산허리에 오늘따라 단풍이 붉다.

▶ 당선소감 송귀연씨(61·경북 포항)

  도시를 떠나 작은 면소재지로 이사 온지가 어느 덧 삼년이 되었습니다. 서툰 농사솜씨로 과수원이며 텃밭을 가꾸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은 농사는 다그치고 서두른다고 결실이 앞당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설거지처럼 미리 준비하며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늦깎이로 문학을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수없이 많은 밤을 새기도 했고 고독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쉽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고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할까 생각했습니다. 6년여, 그 절망의 끝에서 당선통지를 받았습니다.

  설익은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전북도민일보 관계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수필을 시작했을 때의 처음 설렘을 간직하며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끊임없이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시거리문학회> 문우들과 김영식선생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또한 곁에서 노심초사 지원해준 남편과 무한신뢰를 보내준 딸, 아들, 며느리, 손자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심사평 조미애 시인 “작가의 삶은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신춘문예를 목표로 오랜 시간 퇴고한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많은 글 중에서 단 한편만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전국 각지에서 141명이 보내온 총 311편의 수필을 읽고 심사하였다. 대체로 많이 사색하고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재는 물론 연령층도 다양하여 몇 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감상하는 듯 했다. 실제로 소제목을 주어가면서 쓰인 글도 있었다. 글을 통해 새롭게 인식되는 작가의 삶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인데, 글쓴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행복함보다는 하나같이 슬픔이 얼룩진 아련함이었다. 그래서인지 성노동자들의 사연을 소재로 한 글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응모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당선작으로 송귀연의 〈비설거지〉를 뽑았다. 비가 오려고 할 때 비를 맞혀서는 안 될 물건을 거둬들이거나 덮는 비설거지를, 살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인 모습이 신선했다. 문장의 흐름이나 구성 또한 자유롭고 뛰어났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좋은 수필로써 한국문단에 별이 되길 기대한다.

  아깝게 탈락했지만 정문숙의 〈나무 한 그루〉도 좋은 글이었다. 자작나무 숲을 걷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다가왔다. 다만 하나의 흐름을 조금 더 오래 이어가는 연습이 더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옥한의 <잠망>, 권상연의 <호랑이 고모>, 김현숙의 <달을 비우다>, 이종희의 <새품>등도 여러 번 다시 읽은 작품이었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조미애 심사위원 - 약력 
2007년 전북문학상 수상
전북문협 부회장, 전북여류문학회 회장 역임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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