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답족백(洗踏足白)
세답족백(洗踏足白)
  • 양영숙
  • 승인 2016.12.2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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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년이나 기근이 빚쟁이처럼 쳐들어올 때 자고나면 끼니 걱정으로 가난이 원수였던 시절, 그래도 동네엔 밥술깨나 먹던 두서너 집은 꼭 있었다. 이른 새벽이면 이런 집들 주변을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비로 깨끗이 쓸어주던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모른 척 그들 가족을 위해 행랑채에 아침밥상을 차려 주곤 했다. 아마 그 동네에서 아침 해결이 어려운 가족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준 묵시적 끼니 도움이 아닌가 생각된다.

 학창시절, 이름도 생소하여 외우기 힘들었던 을파소가 떠오른다. 고구려 때, 세계최초로 국가가 가난을 관리했던 진대법을 만든 사람이다. 이어 고려의 의창, 조선시대의 상평창이나 환곡, 그리고 최근의 이중곡가제 등 역시 모두 나라에서 가난을 구제하고 힘든 농민들을 도와주었던 제도인 것이다. 그래도 가난은 예나 지금이나 건재하다. 절대적이건 상대적이건 가난은 앞으로도 더 암담할 것이다. 그래서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게 참말인 줄 모르겠다.

 현대에 들어와서 가난의 구제는 복지라는 큰 개념 속에 제도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지원시설은 수천여개에 이른다. 정치권에서는 이 시설들에 대한 지원예산을 두고 증세를 해야 되니 마니, 보편적이네 개별적이네 등등 이래저래 끼니걱정에서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까지 발전된 국가도움이 어렴풋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나 우려된다.

  전주시가 작년 10월부터 시범적으로 운영해 온 동네복지라는 제도가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간 주민복지에서 지자체의 역할은 중앙정부 정책들을 집행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주시가 추진한 동네복지사업은 마을의 복지문제를 공동체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선한 지자체차원의 또다른 민·관 복지정책 사례이다. 다행히 시범초기의 냉소와 회의적 시각과는 달리 지역사회의 복지취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복지자산을 이끌어내 하나둘 문제를 해결하면서 점차 정착되어가고 있다. 비시범동에 비해 복지민원해결은 2.5배, 사각지대발굴과 자원연계건수는 2배이상, 특히 정보를 제공하고 동네의 자원을 연계하여 문제를 해소한 건수는 20배이상으로 나타났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동네는 주민과 공간의 두 요소로 형성된 우리라는 공동체의식 속에 상생과 조화의 사상이 깃들어있다. 동네에 존재하는 공유개념과 의식은 자본주의 속성과 그 양상이 다르다. 복지재정은 늘어나도 취약계층의 삶의 질은 비례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사업을 시행하면서 몇 통의 격려 편지도 받아봤고 타 지자체에서 벤치마킹도 해갔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옛말이 그랬듯이 국민 누구나 최소한의 더운 밥과 따뜻한 옷,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복지의 기본은 국가·지자체는 물론 마땅히 공동체도 나서야 한다. 꼭 헌법에 명시된 행복추구권 때문은 아니고 누구나 다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여 전주시가 내년에 할 일은 더욱 많아진다. 올해 6개동 시범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내년에는 20개동으로 확대하여 동네복지의 양날개인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하는 맞춤형 복지지원을 꾸준히 함과동시에 한편으론 주민들간의 관계를 개선하여 그 지역에 맞는 특화사업들을 추진하여 자발적인 마을 복지공동체 실현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서려 한다.

 세답족백. 상전의 빨래에 종의 발뒤꿈치가 희게 된다는 고사가 떠오른다. 공복인 공무원이 상전인 시민의 빨래를 빨다보면 어찌 발뒤꿈치만이 희어지겠는가.

 한 해가 저문다. 어느 해 보다 불온하고 불안하면서 온통 왁자하고 험악하고 때로는 달콤한 말들이 넘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시린 쪽방에서 담요를 두르고 라면밥으로 하루를 버티는 어르신은 없는지, 부모를 잃고 혹은 떠난 아이들이 어떻게 날 밤을 새는지, 아직도 이른새벽 폐휴지를 줍기 위해 길거리로 나와야 하는 어르신들은 어떤지, 이국 타향에 와서 첫 겨울을 보내는 다문화 가정은 어찌 사는지.. 아직도 남의 집 마당을 쓸어야하는 소외된 이웃들이 있는가 살펴보고 챙기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 발 뒤꿈치는 올 한해 얼마나 희어졌는지도 굽어 볼 일이다.

 양영숙<전주시 생활복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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