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일에도 있고 일을 놓을 때도 있다”
“행복은 일에도 있고 일을 놓을 때도 있다”
  • 청와대=소인섭 기자
  • 승인 2016.11.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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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일문일답]

 고은(KO UN·83·군산 옥구). 한자 대신 영어 이름 표기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시인은 이미 글로벌하다. 시인의 작품은 서른 개 가까운 언어로 번역돼 세계문학의 중심에 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의 영어 번역 한계가 있고 표절 논란과 베스트셀러 순위논란 같은 풍토의 한국 문학에서 말이다.

 한국의 대표적 참여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내 시의 고향은 폐허이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이란 폐허의 자재로 지은 집이어서일 것이다. 무수한 저항이 필요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래서 탄생한 수백 권의 저서, 한국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 요청, 해외 초청 등으로 바쁜 그다. 죽어서도 시를 쓸 것이라는 그를 어렵게 서면 인터뷰했다. 창작열과 사회에 대한 저항과 안타까움, 아내와 시에 대한 극진함 그리고 행복을 읽을 수 있다. 그를 만나보자.

-고향에서는 시인의 일상을 궁금해한다. 노벨상을 기다리는 국민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다.

▲내 일상은 쓰는 일과 읽는 일이 차지하고 있다. 쓴다는 것은 쓰는 것과 사는 것도 뜻한다.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세계를 읽는다는 것도 함께 뜻할 것이다. 지금은 아주 길고 긴 서사시의 도중에 있다. 내년 가을쯤에는 마쳐질 것이다. 20년 이상 내 서재에서 씨 뿌려지고 싹이 돋아나서 그동안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과 초현실을 아우르고 신화나 허구에도 맞닿아 있는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재생과 지속의 주제를 품고 있다.

왜 고향이 나를 상 따위에만 결부시키는가. 내 시가 고향의 마음에 얼마나 담겨 있는가를 차라리 묻고 싶다. 내 시를 얼마나 읽고 있는가.

-문학의 꿈은 어디서, 언제, 어떻게 키웠나. 그리고 고향을 추억해 달라.

▲1945년 8월은 민족해방의 위대한 여름이었다. 식민지에서 모국어를 잃은 어린이인 나에게는 무엇보다 모국어의 해방이었다. 그 이래 나는 3천만 인구의 한반도에서 모국어의 세계에 조금씩 몸을 들여 놓았다. 일본인 학생이 가버린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중학 1학년 국어교과서에서 시를 만났다. 시에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시가 두려웠다. 그것은 도저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여겨져 멀리 했다. 그 대신 나는 미술부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방과 후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린 후 4㎞의 신작로를 걸어서 집으로 갈 때는 으레 저물녘이었다. 어느 날 어둑어둑한 길가에 무엇인가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만히 가서 보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 시초’라는 시집이었다. 누군가가 새로 산 것을 분실한 것이었다. 그것을 들고 집으로 가서 밤 깊도록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울었다. 신새벽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나는 이 시의 화자(話者)처럼 병자가 되어 온 나라를 떠돌겠다는 것, 그리고 나도 시인처럼 시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통곡했다. 기뻤다.

그런 뒤 몇 달이 지나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38선이 바로 무너졌다. 그리고 인공(북한 공산주의 체제) 3개월 동안 고향 일대는 인공체제로 되고 말았다. 그 3개월 뒤 수복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좌우익의 학살과 보복학살은 전선의 백병전에서 죽는 전사를 능가했다. 나는 어디에도 시인의 꿈 따위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은 한반도 몇 백만명의 죽음 가운데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나는 인간의 의미를 승인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어떤 가치도 무가치한 것이었다. 나는 허무 속에 깊이 빠져 버렸다. 내 허무는 19세기 서구 니힐리즘도, 동양 고대의 무(無)사상도 아닌 내 고향상실 속에서 내 심신이 만든 허무였다. 그러다가 휴전 뒤의 폐허와 초토를 떠돌며 한두 개의 시를 습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시의 고향은 폐허이다.

-전북에는 고은 문학상이 있다. 고은이란 이름의 백일장은 몇이나 되나.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계시고 어떤 꿈들이 영글기를 바라시는지.

▲내 이름으로 진행되는 여러 행사를 나는 결코 얼싸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제발 그런 일은 사라지기를 바랄 때도 있다. 하지만 고향의 여러 뜻이 그런 일에 열중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없다. 나는 일종의 공적(公的)인 부재자(不在者))가 되어 있다. 다만 이런 행사들로 인해 고향이나 전국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높은 수준에 닿기를 바란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저질과 천박이다.

-문학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전북의 문인사회나 열정을 평가해 달라.

▲대체로 지역 문학은 일정한 체험 뒤에는 더 이상의 추구가 없는 정착에 머무를 때가 많다. 문학은 70세에도 80세에도 다시 한번 문학의 생도(生徒)가 되어 다른 차원을 갈구해야 한다. 그저 고루한 자기세계에 갇히는 문학은 멈춘 문학이다. 전북은 현대문학의 전통뿐 아니라 이 일대는 한국의 형이상학적 영성(靈性)을 이어오는 신명의 체질을 지켜오고 있다. 예컨대 근대 고승은 거의 다 전북 출신이다. 또 근세 자생(自生)의 철리(哲理)도 이 지역에서 나왔다.

-고향 전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나 들려주고 싶은 고언이 있을 수 있다.

▲전북은 남한의 광역자치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부에의 욕망에 들떠 이 가난을 극복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한편, 가난의 자발적 지속의지와 이 지역을 생태산업의 본산으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쿠바의 모델도 있다.

-최근 3년 만에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 ‘초혼’인데 어떤 작품들로 구성했나.

▲시집을 읽어 보기 바란다. 수시로 쓴 작품들과 함께 한국 16세기 이후의 여러 비명횡사가 쌓인 그 참극의 역사 속에서 여러 혼백을 다시 한번 애도하는 것이 ‘초혼’인데 이것으로 표제시를 삼았다. 이것은 공연을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지난 해 무대에서 내가 낭독하기도 했다.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아끼는 시집, 또는 시가 있나.

▲나는 시와 삶을 나눌 줄 모른다. 내 시에 대한 수량 따위에 흥미가 전혀 없다. 오늘 쓴 시만이 나의 시이다. 나는 오늘 이전의 작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늘 쓴 작품도 내일이면 나는 떠난다.

-팩스도 부부이름으로 쓰는 ‘사랑 시인’이다. 나이 일흔아홉에 첫사랑 시집 ‘상화 시편’을 내고, ‘아내는 나의 헌법이자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사랑을 이야기 해달라.

▲내 아내는 나를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의 절반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랑은 사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적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만의 세상 이상의 것이기를 지향한다.

-고향이 아닌 경기도에 둥지를 튼 사연을 들려 달라.

▲태어난 곳에서만 지키는 삶도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태어난 곳에서만 사는 삶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은 수원서 살고 있지만 그전에는 안성에서 살았고 또 그전에는 서울사람이었다. 수원시대 4년차이다. 지금 나는 이곳에서 진지한 창조의 삶을 살고자 한다.

-우리 문학과 세계문학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인가.

▲ 비교는 자기를 독려한다. 그러나 내 문학은 반드시 한국문학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문학에의 동참인 것이다. 한국문학과 다른 문학의 비교연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한국문학을 세계의 여러 문학과 구별하는 것을 진부하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이 대세인 듯하다. 그만큼 쉼 없이 달려온 때문인가 싶다. 인문학은 어두운 우리 앞길을 비출 수 있는 것인가.

▲인문학은 어느 때는 대세이고 어느 때는 중심을 벗어난 변두리나 모퉁이에 밀려나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찾는 행위이다. 생사에 걸쳐진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느냐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근본적인 질문이 인문이다.

-최근 관심을 두고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어떤 꿈이 영글고 있나.

▲여러 분야다. 천체물리학의 ‘극대’세계와 입자물리학의 ‘극소’세계에도 나는 늘 들어가 있다. 지리에도 과학에도 내 호기심은 닿아 있다. 신화의 세계도 나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시가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시는 사람에 있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나. 시론을 펴 달라.

▲시는 예술의 한 형식, 문학의 장르개념을 넘어서 있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시를 문학에서 독립시키고자 한다. 시는 소설이나 다른 문학형식 밖의 더 깊은 의미에 자리 잡는다. 시는 우주와 인간의 본성이 낳는 율동이다.

-시인의 가슴속에 어떤 아픔이 있나.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살아가고 있나.

▲시인 만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상처의 영혼이 되는 것이 삶이다. 시인은 그런 상처와의 동행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패배를 경험했다. 지금도 불가항력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지치지 않고 항거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시인께서는 저항의 정신을 작품에 담아왔다. 어떤 시각으로 이런 것들을 봐야 하나.

▲무슨 뜻인가. 저항이란 노예의 삶을 그치는 것이다. 저항이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용기이다. 독재나 모순이나 악은 반드시 저항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다.

-다시 시대를 진단해 달라.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어 보이는 예측불허의 시대이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어떤 질환이 있고 어떤 처방이 필요한가.

▲천박한 권력과 간악한 권력이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끌고 가는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중앙이나 지방의 일상에서 시민 또는 인민의 정치의식은 이제 대의(代議)체제의 일회적인 선거에나 등장하는 객체를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시민의 직접참여를 열어야 한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먼저 위기를 생산한 배후를 정리해야겠다. 대안이나 희망은 그다음의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눈으로 보고 아름다운 손길로 쓰다듬고 싶은 사연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그래도 이 세상에는, 우리나라에는 가을의 낙엽이 있고 봄의 들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이웃과 세상을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어느 때인가.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바빠진다. 어느 때는 산중에 들어가 말과 글 없이 지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의 운명은 말의 운명과 글의 운명 말고는 허깨비인 듯싶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여러 시 행사 초청 가운데 1년에 5~6차례를 골라 다니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서재에서 집필하고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는 게 나의 일상이다.

내가 이런 일상의 틈에서 하고 싶은 일은 빈 몸으로 아내와 여행하는 것이다. 한라산에도 오래간만에 다시 오르고 싶고 중국의 태산에도 가고 싶다. 지난해 여름에는 스위스의 산골짝에서 머문 적이 있다. 행복은 일에도 있고 일을 놓을 때도 있다.

-가족관계도 궁금하다.

▲나는 가족 이야기를 별로 내세우지 않는다. 아내는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이다. 그림 그리는 딸이 있다. 지금은 잠시 외국에 있다.

◆고은 시인은

시인의 홈페이지 연보에는 전생과 금생으로 구분돼 있다. 시인은 기원전에 암말로도 태어났고 여자로 출생한 적도 있다. 방랑시인으로 산 적도 있다 했다. 인간으로는 열 번째 태어났다.

시인은 금생 연보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는 이런 시인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까. 전생과 금생은 물론 땅에 몸을 뉘인 후에도 ‘현재형’인 그를 말이다. 전생의 카스피 해안 암말이건, 시베리아에서 인간인 아기 무당으로 태어난 때이건 시인은 아마도 시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뭐라 건 그는 참 행복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지금 그는 집필중인 대서사시에 존재하고 있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 승려가 되었으며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8년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으로 등단했다. 초기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한 이후부터는 어두운 시대 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 의식과 역사의식을 노래했다. 시집으로 ‘피안감성(1960)’, ‘해변의 운문집(1964)’, ‘조국의 별(1984)’, ‘만인보(1989)’ 등이 있다.

국민의 염원인 노벨문학상이 매년 비켜가지만 시인은 은관문화훈장과 시카다상·아메리카 어워드 등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군산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세계한민족작가연합 회장,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거쳐 세계한인지식재산전문가협회 회장을 지냈다.

서울=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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