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자화상 -어머니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너의 자화상 -어머니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 김동수
  • 승인 2016.08.04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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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 9. 전일환

  얼마 전 문학관 자서(自書) 싸인전에서 어떤 원로시인이 쓴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글귀를 보았다.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다. ‘살다’의 어간 ‘살’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란 말엔 한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고, ‘삶’, ‘살이’, ‘살림’ 등의 단어에도 그런 깊은 뜻이 스며있다. 그래서 평생 헝겊으로 누빈 납의(衲衣) 한 벌과 다 떨어진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남기고 입적(入寂)한 해인사의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던가보다.

요즘 난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온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빗물처럼 눈물이 쏟아 내린다. 십 수 년 전, 섣달그믐날 새벽 떡 방앗간에 떡살을 뺀다고 나가신 게 탈이었다. 방앗간에서 스르르 쓰러지신 거였다. 어떤 젊은이가 어머니를 업고 황급히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어머닌 마치 나를 살려달라는 것 같은 허망한 눈망울만 굴리며 아무 말도 못하셨다.

이후로부터 어머니는 당신 삶이 아니었다. 난 어머니를 보며 ‘걷는 게 삶’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움직일 수 없는데 무슨 삶이라 할 수 있으랴. 정말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문상을 가는 날이면 망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고 상주에게 위안삼아 묻는 습성이 생겼다.

어머닌 일제 때 왜놈들 정신대 징용 때문에 15살 소녀 적에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왔다. 그리고 18살 꽃 다운 나이에 누나를 낳았다. 아버지가 남양군도에 보국대로 끌려간 뒤에는 독수공방을 하며 쓰디쓴 신고(辛苦)의 삶도 사셨다. 나를 잉태한 만삭의 몸이었지만, 고향 마을 저수지 공사에 동원되어 흙을 머리에 이고 나르기도 했다니 그 고생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해방이 되어도 보국대로 가신 아버진 돌아오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아버지는 1년 이상을 일본에서 살다가 뒤늦게 귀향을 하셨다. 6.25 사변 땐 동명이인인 여자간첩 때문에 어머니는 간첩으로 몰려 무단히 경찰서에 잡혀가서 억울하게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니 기가 막힌다.

그런 어머닌데 지금은 말문까지 닫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가면 ‘아들’이란 말 한 마디는 하셨는데, 이젠 그런 말도 들을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손을 잡으면 알고 있다는 듯이 당신도 내 손만을 꼬옥 잡을 뿐이다. 그것이 모자간 대화의 전부다. 잠시 어머니의 얼굴 위에 내 얼굴이 오버랩 되어 어른거린다. 마치 훗날 너의 자화상이라 이르듯이.

불가에선 우리 중생(衆生)은 슬픈 존재라고 했다. 중생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부처의 입가에 흐르는 그 잔잔한 미소로 담아낸 자비(慈悲)라는 것일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마치 천만년을 살 것처럼 권력과 명예와 물질에 탐착(貪着)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운가!

하니 고려 말 나옹(懶翁)선사는 <영주가(靈珠歌)>에서 성철 스님과 똑같은 노래를 했나보다. ‘문밖의 푸른 산 반절은 파란 하늘인데/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로다’라고.

* 약력: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수필가, <한국수필> 등단, 한국언어문학회장, 국어문학회장, 베이징한글학교장 역임. 수필집 <그말 한마디>, <옛날엔 정말 왜 몰랐을까>.

저서 <조선가사문학론>, <옛시 옛노래의 이해>, <옛수필산책>, <전북문학의 관점으로 본 한국문학> 등 10여 권.

김동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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