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것
마음을 움직이는 것
  • 이동희
  • 승인 2015.10.08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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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5감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한다. 눈[시각], 귀[청각], 살갗[촉각], 코[후각], 혀[미각] 외에도 영감이 작용하거나, 5감이 겹으로 이중으로 작용하거나 제6감이라는 영감을 통하여 새로운 느낌을 불러일으켜 앎[인식]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 모든 앎의 원천은 감각[느낌]이며, 그 느낌이 작용하는 종착점은 인간의 마음이다.

“믿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믿음은 곧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인데, 무엇이 마음을 움직이게 할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감각기관은 눈[시각]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만이 아니다. ‘문’ 자리에 청(聽), 촉(觸), 후(嗅), 미(味)가 들어가도 하등 다르지 않다.

시각이 곧 느낌[감정]과 앎[인식]의 바탕이 된다는 것은, 보는 것이 믿음의 원천의 되어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나무꾼과 선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꾼이 나무만 하고 돌아오면 늘 ‘선녀 만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어느 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날은 진짜로 선녀를 ‘목격’한 것, 그러니 보지 않았을 때는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럴싸하게 꾸며댈 수 있었으나, 직접 선녀를 보게 되자 말문이 막힌 것이다. 믿음의 최고 경지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게 된 경우일 것이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국립묘지,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 위령탑> 앞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묵념했다. 이런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모습을 ‘목격’하자 유럽인은 물론 전 세계인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독일인들의 진정성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 유럽 언론들은 “무릎 꿇은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보도했다.

유럽이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 중에도 난민들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켜 EU국가와 유럽인들이 난민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동기는 바로 시리아 난민 세 살배기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을 목격하고 난 뒤부터였다.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 인형처럼 작은 남자 아이가 해변 모래에 얼굴을 묻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무심한 파도가 감청색 반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창백한 얼굴과 작은 몸뚱이를 끊임없이 적셨다. 이 모습이 전파를 타고 세계로 번지자 유럽인들이 비로소 마음을 움직여 난민 구호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민주 정부 10년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있다. 과거의 판결들이 잘못되었다는 재심의 결과마저 무시한 채 사건 조작에 참여했거나 방관했던 당사자들이 무릎 꿇고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를 변호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건의 피해자들을 향해 반격하는 형국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모두가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 예술매체를 통해서 과거의 참상을 간접체험은 했으나, 실체적 진실을 ‘목격’하지 못한 대중을 향한 억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선녀를 보았다며 허장성세를 일삼는 나무꾼 닮은 정치인이 아니라, 진짜로 선녀를 본 나무꾼처럼 말문이 막히도록 몸으로 이뤄낸 것만 보여주는 정치인을 ‘목격’하고 싶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 그를 믿고 따를 것이 아닌가?

우리도 과거의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무릎 꿇고 사죄하는 권력자들을 보고 싶다. ‘피로 물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피로 물든’을 용납하지 않으려 국정교과서를 획책하는 꼼수 말고, 세월호 희생 학생 학부모들 앞에서 보이는 악어의 눈물 같은 거짓 연출 말고,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끌어안고 함께 통곡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은 것이다.

미국 시인 E.리치의 시 <죄인들의 땅에서 온 편지> 결구는 이렇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종류의 평화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신록이 우거진 곳을 걷는답니다./ 과거의 우리에게서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면서요, 올해는 사과의/ 단맛이 더하네요. 문이 낡아 허물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당장]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사람 집[육신]’이나, ‘사람이 사는 집[재물]’이나, 자연 앞에 영원한 건 없다. 늦기 전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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