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해결사가 탐하는 것
목숨 건 해결사가 탐하는 것
  • 이문수
  • 승인 2015.09.09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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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저녁에 부는 선선한 바람 끝이 참 좋은 계절이다. 뒷목을 따라 흐르던 땀의 무게를 모두 잊게 한다. 모악산 자락에 있는 도립미술관은 시내보다는 일교차가 더 큰 탓인지 벌써 낙엽이 뒹군다. 화강석 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면 발아래 구이저수지와 경각산이 맞물린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참으로 절경이다. 이 공간에서 매일매일 일하는 필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필자는 유리한 선택보다는 옳은 선택을 위해 노력해 왔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온 탓인지 주변 사람들은 필자를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른다. 간혹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 말이 싫지는 않다. 또 한편으로 반쪽의 진실이기도 하다. 똑 떨어지는 목표를 갖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온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지금은 도립미술관 학예실장직을 맡고 있다. 전북미술을 위해 공적인 고민을 해야만 하는 직책이다.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하고,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어서 신명나게 하고 있다. <아시아현대미술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벽에 부딪혔다. 움직이니까 뭔가에 부딪히고,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라 생각하면서 넘고, 돌고, 더러는 정면으로 뚫어서 해결해 왔다. 가끔은 ‘해결사(?)’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면 이미 반 이상은 해결된 것이라 믿고 목숨 건 해결사가 될 것이다. 20세기 가장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체 게바라(Che Guevara)는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고 말했으니까.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미술부에 들어가 붓을 들었다. 바로 후회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었지만, 선배의 이유 없는 구타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대개 그랬다.) 35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미술판에서 맺어진 인연들이 얽히고설켜서 놀고(?) 있는 터전이 전북미술판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판인지라 편안하기도 하지만 건강한 담론보다는 서로 묻어가는 정서가 강하다.

오는 9월 11일, 이곳에서 돌을 던진다. 아시아 14개국에서 50여 명의 현대미술계의 인사들이 펼치는 특별전. <아시아현대미술전 2015>는 전북미술을 아시아에 선보이고, 국제컨퍼런스를 통해 미술적 담론을 생산하고, 국제퍼포먼스로 흥을 더할 것이다. 전북으로 아시아 현대미술을 불러들이고 전북의 미술가를 아시아로 진출시키기 위한 프로젝트가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아시아는 제국주의 패권에 의해 대부분 식민으로서 근대를 맞이한 아픔을 갖고 있다. 아직도 한국사회의 곳곳에 그 역사의 상처들이 오롯이 남아있다. 하얀 가면의 제국, 우리 안의 사대주의, 서구인의 뒤틀린 오리엔탈리즘, 그로 인해 형성된 옥시덴탈리즘. 그런데도 우리 자신의 미술언어로 프레임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을 짜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취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를 드러내고 우리의 미술적 프레임으로 아시아현대미술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정치적 혼란과 개인의 정체성이 복잡하게 얽힌 잡종교배적인 아시아를 현대미술로 말하려는 것이다.

<아시아현대미술전 2015>에서는 치열하게 내달리는 미술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미술적인 발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아시아현대미술의 힘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기대해 본다. 소비자본이 만연한 절충의 시대에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산정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회와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담아내는 데 예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사람살이에서 생겨나는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고 인문학의 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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