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최초 희생자
[한국사 이야기] 최초 희생자
  • 권익산
  • 승인 2015.05.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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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이 5·18민주화운동 35주년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를 떠올린다. 35년 전에 일어난 일이기에 40대 이상의 어른들은 직간접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5·18 민주화 운동 최초의 희생자는 광주가 아니라 전주에서 발생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으로서 유신 독재가 끝나는 줄 알았던 많은 국민들은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놀라고 당황했다. 35년 전 봄 전국의 대학은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학생들로 분주했다. 그 해 5월 전북의 대학생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요구를 군대를 동원해 제압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계획에 따라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주요 대학은 군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날 저녁 전북대학교에도 많은 학생들이 학생회관에서 먹고 자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가 총칼로 무장한 공수부대에 의해 쫓겨나거나 잡혀갔다. 이때 공수부대를 피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던 학생 한명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바로 5·18민주화운동 최초의 희생자인 전북대학교 학생 이세종이었다. 당시 정부의 공식 발표는 단순 추락에 의한 사망이었다. 하지만 이세종 열사의 부검을 담당했던 의사는 추락 이전에 이미 여기저기 구타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증언을 하여 단순 추락사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이세종 열사는 최초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단순 추락사라는 정부 발표 때문에 또는 광주가 아닌 전주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1998년에 가서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 동료 학생들은 추모식마저도 몰래 가져야 했으며, 1985년 어렵게 추모비를 만들어 교정에 세웠지만 한 달 만에 경찰이 가져가 버리기도 하였다. 지금 전북대 학생회관 앞 이세종 광장에 서 있는 추모비는 6월 민주항쟁을 거친 1988년이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세종 열사가 계엄군에 쫓기던 그 날 원광대생 임균수는 광주로 갔다. 그리고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던 5월 21일 도청 앞 집회에 참여하던 중 군인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전북 출신 두 번째 희생자였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광주 5·18민주묘역에 누워 있고, 전북대와 원광대 학생회관 앞 잔디밭 한 켠에는 두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한 권력에 정면으로 저항한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폭도라는 누명을 벗기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1988년 국회 청문회를 통해 처음으로 광주의 진상이 전 국민에게 알려 질 수 있었고, 1996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16년간이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한 결과로 조금씩 발전해 온 것이다.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외국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려는 일본 정부와 진실을 직시하려는 독일 정부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최근 일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의 소행이라거나 폭동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역사를 잘 모르는 학생들 중에는 이 거짓말을 믿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거짓말이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진실 규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학교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현대사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이세종 열사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후 일 년 동안 대한민국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다양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35년 전 폭도들의 난동을 군이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전두환 정권의 발표를 그대로 믿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광주에서의 학살을 한때의 불행한 사건이라 여기고 진실을 밝히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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