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보내며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보내며
  • 원도연
  • 승인 2014.12.17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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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지나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100주년을 맞으면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이 사건을 널리 알리며 기념하는 일을 현장에서 돕고 지켜본 1994년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혁명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고, 각 지역마다 동학농민혁명을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리며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그간의 성과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 무엇보다 그간의 기념사업이 동학농민혁명의 사실 관계를 밝히고 이 사건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정립하는데 중심을 두어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단계의 기념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열린 ‘전주정신과 동학농민혁명’ 심포지엄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열어주었다. 특히 서울대 정근식교수가 주장한 청일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동학농민혁명이 가진 국제적 성격에 주목한 것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을 ‘1894년 동북아시아전쟁’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894년은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청일전쟁이라는 국가적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해였다. 물론 이 세 가지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하나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고 깊었다. 갑오개혁 역시 일본의 압박이 결정적이었고 내용상으로 성공여부를 평가할 수 없지만 어쨌든 법적, 제도적으로 조선이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일종의 선언이 된 셈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조선조정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일본은 청과 맺은 협약을 빌미로 동시출병을 강행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일본이 그린 시나리오대로 만들어졌다. 청나라는 일본군에 연전연패하면서 산둥성까지 밀려났다. 중국은 결국 굴욕적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며 아시아의 강자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일본은 이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한 반면, 청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중국이 이 전쟁을 기념하는 방식이다. 중국으로서는 치욕스럽게 패배한 전쟁이지만 이들은 이 사건을 일방적인 희생과 분노, 일본의 만행이라는 측면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위해의 유공도에 있는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은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의 역사인식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은 청일전쟁 당시 중국의 북양함대가 기지를 두었던 곳이다. 중국의 북양해군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그 지휘부가 있었던 이곳까지 철저히 유린되었다는 점에서 치욕스러운 장소지만, 중국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곳에 박물관을 세웠다. 이 박물관의 마지막 결론은 ‘천애하처시신주(天涯何處是神州)’로 표현된다고 한다. 정근식 교수는 이를 ‘신이 내려준 땅 중국은 아슬아슬한 위기에서 어디로 가나’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결론의 의미는 역사를 교훈삼아 강력한 해양강국의 건설로 맺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지나면서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만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시 조선의 농민들이 조선과 청나라, 일본의 각축 속에서 궁극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인가를 좀 더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제 단순한 국가 단위의 내전으로 평가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1894년을 전후해서 밀어닥친 서구제국주의의 물밀듯한 도전과 그에 맞서는 아시아 민중들의 저항이라는 관점, 그리고 그 속에서 각기 근대사회를 향해 변화하는 조선과 중국, 일본의 대응과 각축이라는 복잡한 요소들이 이 속에 있다.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은 단지 지나간 역사를 자랑하고 기념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금 다가오는 21세기 위기에 대한 지혜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원도연<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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