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산의 한국사이야기] 8·15
[권익산의 한국사이야기] 8·15
  • 권익산
  • 승인 2014.12.04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들의 기억은 제각각이다. 역사의 기억은 이 제각각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을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이다.

  8·15 광복에 대한 기억도 사람마다 다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항복 방송을 하자 우리민족은 기쁨에 겨워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8월 15일 조선은 조용했다. 라디오에서 방송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조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여전히 일본 군인과 경찰이 총칼을 들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독립을 실감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 만세의 함성을 외치기 시작한 것은 하루가 지난 8월 16일이 되어서야 이다. 35년간 태극기를 집안에 보관하고 있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장기를 이용해 태극기를 만들어 거리로 나온 것이다. 우리민족 모두가 기뻐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걱정인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도 우리민족인 친일파들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우리민족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독립을 준비한 여운형, 안재홍 같은 민족 지도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벌였다. 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자주적인 국가 건설 노력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38선은 처음에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지도에 그은 선에 불과 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커져갈수록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려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38선은 점점 분단의 선으로 바뀌어 갔다.

  이때 민족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이었다. 신탁통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로 시작된 이견이 좌우익의 대립으로 바뀌고 민족인가 친일인가로 나누었던 기준이 좌익인가 우익인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념 갈등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나타났다. 우익의 송진우를 필두로 여운형과 김구 같은 지도자들이 암살당하는 테러가 횡행했고, 좌익은 북으로 우익은 남으로 헤쳐 모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좌우 대립은 민족에게는 비극이었으나 친일파들에게는 기회였다.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이 이제 그들의 상전인 일본인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벌였고 그들의 노력은 집요했다. 일본인 지배 아래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고 좌우 대립의 와중에 우리 민족끼리 가한 폭력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했던 폭력보다 훨씬 잔혹했다. 이 와중에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고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지낸 김원봉 같은 이마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테러의 위험을 피해 북으로 갔으며. 소련군 점령하의 신의주에서는 학생들의 반공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23명이 죽고 700여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 돈을 벌려는 사기꾼들도 있었다. 경찰과 통역을 매수하여 공장 관리인에게 누명을 씌워 공장을 빼앗고 관리인은 형무소로 보내는 일도 벌어졌다. 게다가 이를 알고 바로잡으려는 검사들마저 좌익으로 몰려 공격당해야 했다. 사기꾼들에게 “일본 사람들한테 억눌려 산 것도 분한데 이제 미국 놈한테 붙어서 한국 사람을 괴롭히냐? 라고 호통치듯 한 말이 좌익 반미 검사의 증거로 제출되었다.

  해방 이후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한 이들도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해서 창녕군수를 지냈던 이항녕은 일본에 붙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 말기 군수로써 전쟁물자 조달, 징용, 공출 등을 수행했다. 비록 부하 직원을 시켜서 하는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가혹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자신이 조금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조선 사람을 괴롭힌 죄인이었다고 고백하였다.

  8·15 광복은 일제의 패망으로 새로운 민족의 삶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지만 38이 그어짐으로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원광고 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