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5. 보이차의 위기
[김세견의 보이차이야기] 5. 보이차의 위기
  • 김세견
  • 승인 2014.09.25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 아샘주에서부터 중국의 운남까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엄청나게 많이 자라고 있던 보이차 나무가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정도로 적은 수만 남기고 있다.

 첫째, 프랑스와 영국의 잇단 침입이다. 17~18세기에 들어서자 차무역이 국부(國富)의 중심이 되었다. 열강들이 이 무진장한 차원료 공급원을 그냥 두었을리 없다. 운남만 하더라도 프랑스와 영국이 10여 차례 이상을 침입한 기록이 있다. 열강의 침입에 저항하던 크고 작은 전투들 때문에 많이 차밭이 소실되었다.

 둘째, 청나라 옹정제 연간에 일어나 차상인의 난이다. 운남의 시솽반나(西雙版納) 지역은 원래 차상인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지배되던 구조였는데, 청나라 조정이 이 차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자 그에 반발하여 차상인들이 난을 일으킨다. 이 난은 한두 차례가 아니고 청나라 말기까지 계속 산발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때 많은 차밭이 훼손되었다.

 세째, 국공 내전이다. 국공 내전의 마지막은 운남을 거쳐 영국령 버어마(미얀마)로 후퇴하는 장개석 군대와 이를 ?는 모택동 군대간의 전투다. 운남 곳곳의 고수차밭으로 큰 도로가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국공 내전 때 낸 군사도로이다. 장개석을 따르던 국민당군은 이후 버어마로 넘어가서 계속 군벌을 유지하는데, 이곳이 바로 유명한 황금의 삼각지대(golden triangle)이다. 장개석 군대가 대만으로 옮겨가면서 재정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직접 마약을 재배하고 유통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국제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자 대만 정부에서 계속 이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1981년까지도 이들은 중국 정부와 반목을 했다. 최근에는 이 지역의 상당부분을 중국 정부가 조차하여 관광지화 했고 많은 카지노가 성업중이다.

 넷째, 문화혁명이다. 다른 지역의 문화혁명은 타도 지주였으나, 운남 남부의 문화혁명은 타도 고수차였다. 오래된 차나무를 뽑아내고 거기에 녹차밭을 만들었다. 여러 전쟁 통에 남아 있던 고수차들이 이 때 철저하게 훼손된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상해 혹은 호남성에서 온 홍위병들에 의해 거의 전 지역의 고수차가 유린된다. 이 때 보이차의 대안으로 조성된 녹차밭은 현재엔 수익성이 낮아서 커피밭으로 많이 바뀌고 있다. 이 때 홍위병으로 왔던 어린 학생들은 상당부분 돌아가지 않고 운남에 잔류하게 되어 운남 지역 사회의 중요한 일원들이 되었다.

 다섯째, 큰 산불이다. 1973년 가을 건기부터 시작된 대형 산불은 이무, 상명 지역의 거의 모든 숲을 태우고 1974년 늦은 봄 우기가 와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문화혁명의 와중에도 깊은 산속에서 조금씩 명맥을 유지하던 고수차들이 씨가 마르게 된 것이 이 산불이다.

 

 김세견<차마루 교육원장> <이 자료는 보이차를 탐구하는 모임 프얼티클럽, 차마루에서 지원받아 게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