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문화재 등록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문화재 등록
  • 소인섭 기자
  • 승인 2014.03.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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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8)

 역사적 현장은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할 때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동학농민혁명유적지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해 기억하고 기념해야만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조선 전역에서 일어났다. 황해도 해주, 강원도 강릉, 경상도 상주, 경상도 하동, 경기도 안성, 충청도 태안, 충청도 보은, 전라도 순창, 전라도 무안 등지에 동학농민군의 숨결이 서려 있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안타깝게 동학농민군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누구도 그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이 유적지임을 알아야 하고 또 누구에겐가 유적지임을 알려줘야만 한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는 전국적으로 354개소에 이른다. 전북이 156곳으로 가장 많고 서울 1곳, 대구 3곳, 광주 3곳, 울산 1곳 경기 3곳, 강원 13곳, 충남 40곳, 충북 23곳, 전남 81곳, 경북 27곳, 경남 3곳 등이다. 그러나 그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어떤 표시도 없기 때문에 알리 없다. 잘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적지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재지정이나 등록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예산을 투입해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 문화재는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지정문화재인 전봉준고택(사적 293호), 황토현전적지(사적 295호), 우금치전적지(사적 387호), 황룡전적지(사적 406호), 백산성(사적 409호), 석대들전적지(사적 498호) 등 6건이 있다.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살았던 전봉준고택을 제외하면 모두 동학농민군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도지정문화재로는 만석보터(전북기념물 제33호), 홍천풍암리 전적지(강원도기념물 제25호), 손병희선생 유허지(충북기념물 제30호), 금성토평비(전남문화재자료 제175호), 하동 고성산전투지(경남기념물 제142호), 수운최제우 유허지(울산기념물 제12호), 강재일사(전남유형문화재 제206호), 상주 동학교당(경북민속자료 제120호), 말목장터와 감나무(전북기념물 제110호), 고부관아터(전북기념물 제122호), 금성정의록(전남유형문화재 제286호) 등 총 11건이 있다.

 이밖에 시·군 향토유적으로 최시형선생묘(여주군향토유적 제8호), 송장배미(공주시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 문바위골(옥천군향토유적 제2009-2호) 등이 있으며 의암 손병희선생 묘역이 등록문화재 제515호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지정 사유가 동학농민혁명이 아닌 경우가 53건에 달한다.

 결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354건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21건으로 6%에 불과하다. 지정 사유가 동학농민혁명이 아닌 54건을 포함하더라도 총 74건으로 21%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뿐이다. 나머지 79%는 거의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됐으나 숭고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등록문화재 추진이 필요하다. 등록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나 시·도지정문화재에 비해 재산상의 불이익이 없으며 문화재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등록문화재로 추진이 가능한 동학농민혁명유적지로는 김제 원평에 있는 집강소가 있다.

 이 집강소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장군이 대도소를 설치한 곳으로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장소이다. 이 집강소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건물이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은 방치돼 거의 무너지기 직전에 놓여 있어 위엄을 되찾아 주는 일이 시급하다. 김제 원평 구미란의 무명농민군 무덤도 등록문화재 지정이 가능한 유적지로 꼽힌다.

 우금치 전투에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남하하면서 원평 구미란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고 여기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바로 구미란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동학농민군의 집단매장지이며 봉분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보호받아야만 하는 곳이다.

 대둔산 최후항전지 역시 중요한 등록문화재 지정 대상이다. 1894년 11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대둔산 최고봉인 마천대 아래 형제바위 옆 바위 위에서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최후까지 항전했다. 일본군 토벌대의 보고에 따르면 소년 한 명을 제외한 수십 명의 농민군을 사살했으며 이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다. 김석순이라는 접주는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150m 절벽으로 뛰어내려, 그 참상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동학농민혁명 전투지로서 유일하게 현장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로 보존 관리돼야 할 곳이다.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천안전씨 종중에서 동학농민혁명 1주갑이 되는 1954년 전봉준고택 근처에 단소를 설치하고 단비를 세웠다. 이 단비는 동학농민군을 기념하는 최초의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비록 전 장군의 시신이 없는 허묘이지만 이곳 단비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밖에 경전간행지인 김현수 집터(강원 인제), 예천 농민군생매장터(경북 예천), 농민군처형지인 나주초토영터(전남 나주), 집강소설치지인 무안 청천재(전남 무안), 태인전투지(전북 정읍), 삼례봉기터(전북 완주), 전봉준피체지(전북 순창), 김개남고택터(전북 정읍), 최제우의 수도지인 은적암(전북 남원), 전봉준생가터(전북 고창), 관작리전투지(충남 예산), 농민군 처형지인 교장바위(충남 태안), 북실전투지(충북 보은) 등의 유적지는 최소한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돼야만 하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원군효유문, 남원군종리원(남원군동학사), 순교약력 등의 자료도 충분히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관련 주체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지방자치단체·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단체·동학농민혁명 유족 등이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은 올해, 혁명 유적지를 문화재로 지정한다면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것이다.

 소인섭 기자
 이병규<농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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