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계
사랑의 온도계
  • 이경신
  • 승인 2014.01.19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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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과 딸,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여느 부모처럼 돼지 저금통을 사 주곤 했다.

  남편을 닮아 고지식한 아들은 용돈이 생기면 꼬박꼬박 돼지 저금통에 저금해 항상 묵직했으나 딸내미는 오빠와 달리 겨우 영양실조를 면할 만큼 돼지밥 주는 일을 게을리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의 저금통이 배를 가른체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모른 척 지나칠까 고민하다 딸내미의 버릇을 바로잡을 겸 ‘돼지저금통 수술사건’에 대해 이유를 추궁하니 묵묵부답 고집을 부렸다.

  끝내 회초리를 들고서야 들었던 사연은 그 당시 유행하던 초등학생들의 생일잔치가 발단이었다.

  대부분 부모들이 약간의 돈을 들여 생일잔치를 열어주었으나 딸내미의 짝꿍은 그럴 처지가 못돼 잔치를 열 수 없자 딸내미가 자신의 돼지저금통을 털어 모두 건네줬다는 것이다.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싱겁기 그지없는 딸은 그 후로도 용돈이 생기면 과자를 사 온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골목대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제는 다 커 아들은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지만 딸은 여전히 제 것 챙기기 보다는 남의 일이 먼저인 것을 보니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맞는 것 같다.

  돼지 저금통 사건이 우리 집의 작은 추억이지만 우리 고장 전주에는 매년 연말이면 얼굴없는 천사의 돼지 저금통 사건의 우리를 긴장시키고 또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곤 한다.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통해 58만원이 든 돼지 저금통을 노송동 주민센터에 보낸 이래 14년째 마치 숨박꼭질 하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현금 뭉치와 동전이 가득 찬 돼지 저금통을 보내오고 있다.

  지금까지 3억5000만원을 보내와 한때는 언론이 얼굴없는 천사를 취재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전후로 노송동 주민센터 부근에 카메라를 숨기고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 번번이 따돌리고 아름다운 선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전주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아름다운 기부를 기리기 위해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 275m 구간을 천사의 거리로 명명하고 지난 2009년 12월엔 천사비(碑)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 한옥마을에서 천사비석까지 ‘천사의 길’로 명명해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이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곤거린다고 하니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북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운영하고 있는 사랑의 온도계가 올해는 영 시원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30일 출범식을 갖고 이달 말까지 모금활동을 벌이며 사랑의 나눔을 온도계로 표시하는 사랑의 온도탑이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어 싸늘하다는 것이다.

  얼굴없는 천사 등 익명의 독지가들은 여전히 줄을 잇고 있지만 기업체와 도시민들의 사랑나눔 실천의지는 어려운 경제상황 만큼이나 각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북지역 목표액은 지난해(42억4800만원)보다 6.3% 오른 45억1500만원으로 정했으나 지난 21일 현재 39억4700여만원으로 목표치의 87.4%에 그쳐 전국 평균 89.7%보다 2% 넘게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북의 이 같은 저조한 실적은 타 지역과 대조적으로 이미 서울을 비롯해 충남.북, 대전, 대구, 광주, 제주 등 전국 7곳이 목표액을 돌파해 사랑의 온도계가 펄펄 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북지역은 이대로 가다가는 13년 연속 100도 돌파라는 나눔의 명색이 무색할 처지라는 것이다.

  이 같은 원인은 법인과 개인보다는 기업체의 기부액이 현격히 줄어 지난해 기업체의 전체 모금액이 29.2%를 차지했지만 올해는 20.7%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군단위의 농촌보다는 시단위의 도시지역이 기부에 인색한 것으로 드러나 인구별 1인당 모금액을 환산하면 농촌지역은 2197원, 도시지역은 1468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거리가 마땅치 않고 인생살이가 어렵다 보니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사랑의 온도계가 이대로 멈춰서는 것은 결코 안 될 일이다.

  전북은 예로부터 인심의 고장으로 드넓은 벌판에서 벼베기를 한 논 주인들은 땅 한 평 없는 이웃들을 위해 이삭을 줍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작은 배려와 콩 한쪽도 나눠먹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을 실천할 때이다.

 이경신<(사)전라북도 방범연합회 여성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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