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부봉기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고부봉기
  • 소인섭 기자
  • 승인 2014.01.16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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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2)

만석보

 올해로 동학농민혁명은 120주년을 맞이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내용이 있다. 바로 역사란 역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에 되살려 새 역사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란 멈춰있는 대상이 아니라, 쉼 없이 살아 움직여 앞날을 개척하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희망의 불씨로 작용하는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은 무엇을 말하나

많은 사람은 말한다. 120년 전 시대상황이 오는 날과 비슷하다는, 되풀이되는 순환의 역사이야기들을. 왜 오늘 날 ‘사람, 다시 하늘이다.’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고 있는지, 다시 민중들의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집단과 대기업의 성장위주라는 것에 민심은 외면당하고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투쟁의 외침을 멈추지 않는 농민·노동자들의 함성이 무엇을 바라는지 깊게 생각하고 슬기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강대국들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그들의 국익만을 챙기려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시대상황이나, 국내적으로 부자는 부자로, 가난은 가난으로 세습되는 빈부격차의 양극화가 고착되는 지금의 현실과 120년 전이 같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수십만의 희생을 감수하며 세계사에 빛나는 역사를 이루었던 당시의 역사를 거울삼아 이 시대의 요구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하자는 것이다.

▲ 고부기포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혁명의 전야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892년 조병갑이 군수로 오면서 동학농민들의 혁명은 예고됐다. 당시 조병갑은 보를 새로 쌓으면서 임금조차 주지 않았고 수세를 과하게 거둬들였다. 또 개간한 땅에서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 들였으며 농민들을 상대로 불법적으로 상업행위를 일삼는 등 도를 넘는 폭정으로 원성을 샀다. 고부군민은 이에 전라감사에게 조병갑의 폐정 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사발통문(沙鉢通文) 봉기의 거사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전봉준 접주는 이러한 거사 계획이 실현되려면 보다 더 강하고 많은 동학농민들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동학의 거두 손화중 대접주에게 상의하였으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자 우선 독자적으로 결행에 나선다.

정부는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을 고부군수의 재임을 결정했고 이에 전봉준은 10일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그날로 고부관아를 점령한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김문현은 이후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는 2월 15일 조병갑을 체포한다.

동학농민군은 1월 25일 백산으로 이동해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의 동태 등을 파악하면서, 2월 23일 고부군을 다시 점령하는 등 한 달 동안 혁명의 기세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2월 말경부터 여러 악조건들의 문제로 일부 내부의 동요가 일어났다. 이에 전봉준은 2월 19일경 전라도 각 지역에 격문을 띄워 대규모 동학농민혁명의 기포를 시도한다.

고부봉기는 멀리 전주의 접주들과 각 지역에서도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전봉준과 고부의 동학농민지도부는 전략상 해산을 결정한다. 전봉준 접주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금구(현재 김제) 원평의 김덕명 대접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후를 노리자며 격려했다.
 

무장기포비.

▲ 무장기포

 동학농민군의 중간지도층의 요구로 해산하면서 기대했던 변화의 내용들은 물거품이 되고 관군의 조직적이며 가혹한 탄압이 시작된다. 동학농민들이 해산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열흘도 안돼 안핵사 이용태가 군사 800여 명을 몰고 고부에 들어와 신임군수 박원명에게 호통치며 동학당의 두목들을 찾아내라 다그쳤다. 군사들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산을 갈취했으며, 남자농민들은 닥치는 대로 결박하여 짐승처럼 끌어 갔다.

전봉준 접주는 김제 금구 원평의 김덕명 대접주에게 기포한다는 연락을 했고, 3월 13일께 소수의 동학농민들을 데리고 고부를 떠나 무장의 손화중 대접주에게 도착한다. 이는 동학의 가장 큰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손화중에게 몸을 숨기고 동참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 동학조직을 통한 발 빠른 연락망이 가동돼 원평과 금산 등 여러 곳에서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고부봉기 후 2월(음력)경부터‘보국안민, 창의대의’라는 혁명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수많은 민중들이 동학에 휩쓸려 정부에 반항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동학당’이라 하였다. 또한, 3월 11~12일경 동학당 약 3,000여 명이 원평금구를 거쳐 부안 쪽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으며, 3월 12일 금산에서 동학도 수 천 명이 몽둥이를 들고 흰 두건을 쓰고서 읍내에 모여 아전의 집을 불태웠다’고 돼 있다. 고부기포 격문발송 이후 다른 곳에서도 본격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전봉준은 무장의 손화중에게 다시 한 번 기포해야 한다는 간곡한 청을 했다. 당시 이러한 움직임이 부안 김낙철 대접주 친동생인 김낙봉 접주에 의해 동학 2대교주 최시형에게 보고됐고, 최 교주는 통문을 보내 전봉준의 자중을 지시하기에 이르른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교시를 전국에 하달한다. 결국, 김덕명·손화중·김개남·김낙철 등 대접주들의 망설임이 있었다. 그러나 손화중은 끝내 전봉준의 설득과 시국의 상황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중대결단을 하게 된다. 3월 16일부터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에 손화중 포 소속 동학농민군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창으로 무장했고 군량미도 확보해 둔 상태였다. 무장관아의 설들과 만류가 있었지만 동학군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과 손화중을 중심으로 수 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포고문(布告文)을 낭독하고 무장기포 즉 동학농민혁명의 힘찬 출발을 선언한다.

포고문은 ‘세상에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로 시작해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로 마무리 되는, 당시 동학농민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준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전봉준과 손화중 장군의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현을 떠난 21일 고창현과 22일 흥덕현, 23일 부안현을 거쳐 고부에 도착해 고부군을 점령한다. 다음날 24일 전략적인 요충지 백산으로 이동하여 김개남·김덕명 등 대접주들이 참여하고 전봉준 장군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본격 혁명군의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자문위원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
▲자문위원 이윤영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소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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