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화가로 피어난 꽃 이중섭
국민화가로 피어난 꽃 이중섭
  • 이흥재
  • 승인 2014.01.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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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의 시체 안치실. 영양실조에 걸린 듯 참혹하게도 깡마른 40세가량의 남자 시체 1구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사흘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아무리 청량리 뇌병원의 무료 환자실에서 내과치료를 받기 위해 옮겨졌다지만,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가운데 한 영혼은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18만환이라는 입원비 부채를 남겨놓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가 1956년 9월 6일 상오 11시 45분이었다. 오늘날 그의 존재를 모르면 마치 문화인이 아닌 것처럼 명성이 드높은 ‘국민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은 그렇게 외롭게 죽어갔던 것이다. 

 대중 속에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갖고 있는 이중섭이지만 실제로 그의 실체가 선보인 것은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광복 이전인 1940년대에 한국인 화가들끼리 결성한 신미술가협회전에 몇 번 참가한 것이 한반도에서의 작품을 선보인 것의 전부이다. 그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50년대 전반기에 이루어졌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유작품의 대부분은 이 시절에 그린 그림들이다. 6·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이래 제주,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지를 떠돌며 제작한 것이었다. 한 곳에 정착하여 완성된 본격회화보다는 안정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그린 소품들이 많은 이유는 6·25 전쟁 때문이었다. 

 ‘몰락한 귀족의 풍모’를 보였던 이중섭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미술과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미국 예일대 미술과 수석 졸업 후 유럽 미술계를 시찰하고 귀국한, 당대 최고의 미술선생님인 임용련을 만나 탄탄한 미술교육을 받게 된다. 

 일본 문화원 유학시절, 그는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루오처럼 시커멓게 데생하는 조선 청년이 나타났다”고 하여 주목을 끌었다. 어떻든 그는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문학수 등과 함께 보다 진취적인 미술사조로 자신의 조형어법을 구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29세 때 일본 유학시절, 동기생 마사코를 만나 결혼하였고, 얼마 안 가 6·25전쟁을 맞는다. 생활고 속에서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의 친정으로 보내고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을 못내 그리워하며 외롭게 제작했던 고통의 산물들이 그의 작품이다. 그만큼 어려운 시절에 예술혼을 작품에 쏟은 것이다. 그는 결국 가족들에 대한 처절한 그리움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얻어 가슴 아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중섭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리 만큼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여기에다 그의 비극적인 생애가 더욱 이중섭의 작품을 농도 짙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그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소재부터가 지극히 일상성을 띠고 있으며 ‘접근하기 쉬운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이중섭, 박수근, 권진규 같은 작가들을 보면 ‘명화는 마치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숙명을 삼키고 태어나는 것 같다.’는 가수 김창완씨의 말이 실감난다. 정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는 것 같다. 

 흔히들 박수근의 작품은 화강암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인네들이나 나목들을 평면처럼 묘사했다고 말한다. 반면, 이중섭은 소 그림 등을 통해 거칠고 격렬한 붓질로 강한 생명력을 노래했으며, 그림에 등장하는 새, 물고기, 아이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의 가족에 대한 강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른 작업 방식이지만 두 화가 모두 불행한 삶 속에서 우리들의 국민화가라는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이흥재 / 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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