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지않는 노 전 대통령 추모열기
식지않는 노 전 대통령 추모열기
  • 하대성
  • 승인 2009.07.23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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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두 달이 넘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과 고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의 발길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하거나, 직접 차를 몰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는 이들이 평일엔 4000~5000명, 주말에는 1만 명 이상이 찾고 있다는 것. 이는 기자가 지난 19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김해시노무현대통령생가관광안내센터’에 따른 결과다. 안내센터 담당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집계한 숫자가 이정도고 그 전후에 다녀간 참배객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고 말한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 회원은 “참여정부와 퇴임 뒤 노무현 대통령께서 한 일을 언론이 제대로 알리지 않았지만, 서거 뒤 대통령의 생각 등을 알게 되면서부터 미안함에다 관심이 높아지면서 계속해서 찾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참배객들은 서울ㆍ경기ㆍ호남ㆍ충청 등 전국 각지에서 찾고 있다. 특히 주말에는 가족단위 참배객이 많다. 사저 앞에 있는 생가 복원 공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다. 김해시는 올해 초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으며, 8월 중순경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찾은 일부 참배객들은 흐느껴 울기도 한다. 참배객들은 국화꽃을 들고 와 묘역 앞에 놓기도 하고, 봉분인 비석을 어루만지며 분노를 터트리기도 한다. 봉분이라고 해야 가로 2미터 세로 2.5미터, 높이 40센티미터의 돌이다. 자신이 묘지기라고 말하는 한 남자는 노 전 대통령의 비석은 충남 부여에서 가져온 너럭바위 형태로 봉분 구실도 겸하게 된다고 말한다.

기자가 직접 비석을 손으로 만져봤다. 대통령의 묘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초라하다. 비석 겸 봉분이라고 하지만 그냥 맨땅 위에 작은 돌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있는 형태다.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의 구릿빛 철판 위에 앉혀진 비석엔 “대통령 노무현”이란 글자가 선명히 적혀있다. 봉분 앞 철판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참배객들이 참배를 하는 동안 간혹 어린애들이 비석에 발을 얹고 앉아있기도 한다.

기자는 오후 1시 반쯤 점심도 거른 채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내린 부엉이 바위와 유골이 안장된 정토암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전국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산을 오른다. 길옆에는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들이 노랗게 띠를 이루고 있다. 한 참을 걸어 올라가니 노 전 대통령이 고시공부를 했다는 토굴이 있었으며, 토굴 옆에는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磨崖佛)이 눈에 띄었다. 이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조각된 앉아있는 석불(石佛坐像)로 발견 당시 산중턱 바위틈에 끼어 옆으로 누워있었다. 양손과 왼쪽 어깨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잠시 후 부엉이 바위에 도착했다. 바위 위를 둘러보며 노 대통령이 뛰어내린 난간에 서봤다. 머리가 쭈뼛하고 몸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으슬으슬했다. 이곳에서 대통령이 뛰어내리다니, 대통령이 서 있던 바위 위에서 바라다 본 봉화마을 산자락과 앞뜰의 논은 슬픔도 모른 채 푸르고 푸르게만 보였다.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배고픔을 잊은 듯 시장기도 들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정토원 법당인 ‘수광전’으로 옮겼다, 법당 안 노 전 대통령의 영전엔 조문객들이 놓고 간 하얀색 국화가 놓여있었다. 대구 송현동에서 왔다는 주부 서주연(51)씨는 “가장 서민적이고 친근한 대통령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며 “어느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에 내려와 환경을 가꾸면서 삽니까? 나는 그런 점이 참 존경스러웠어요.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걸요.”라고 했다.

광주 풍암동에서 왔다는 김상훈(45)씨는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보면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호화스럽게 보였는데 실제 와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전직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에서 고향 분들과 어울려 산다는 게 존경스러웠는데 결과는 불행한 대통령으로 남게 돼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오후 3시쯤 정토원에서 생수로 목을 축이고 봉화산을 내려오다 다시 노 전 대통령 낙사 지점인 부엉이 바위 밑으로 향했다. 흙먼지가 풀석이는 산길에서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취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가버린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일이던가! 그가 보수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을 때 저만치 비켜서서 지켜보았던 일, 그가 검찰에 끌려가던 날 그를 혼자 가게 했던 일들이 내 잘못인양 가슴을 내리쳤다. 저승의 길목이 되어버린 그곳을 보며 울컥했던 마음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부엉이 바위 밑에서 만난 수원에서 왔다는 강효남(47)씨는 “노무현 대통령은 평생을 후원금으로 사셨는데 검찰과 사이비 언론이 연일 떠드는 바람에 그가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됐고, 특히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도 검찰에서 주는 자료를 그대로 받아썼다.”며 일부 언론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강 씨는 또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갈 때 한 마디 말도 안고 있다가 노 대통령이 죽고 난 후 내 몸 절반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한 말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며 김 전 대통령에게도 불만을 표시했다.

부엉이바위 밑에서 내려오는 길, 노 대통령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던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지만 보고 있는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기자는 아직 봉하마을을 가지 못한 국민들에게 한 번쯤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제 봉하는 작은 마을이 아니다. 죽음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이상을 세우려 했던 전임 대통령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오후 4시쯤 차를 운전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 사저 앞을 지나오는데 길가에 길게 늘어진 추모 현수막과 추모 글들이 기자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가 우리 국민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의 죽음이 이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가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깊은 이면을 헤아리며 봉하마을을 떠나왔다.

신영규 도민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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