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로 보는 전북 부흥의 길] <104>개인도 지자체도 운이 다하면...(1)
[풍수로 보는 전북 부흥의 길] <104>개인도 지자체도 운이 다하면...(1)
  • 김두규 우석대 교수(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승인 2023.12.07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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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로 보는 전북 부흥의 길
풍수로 보는 전북 부흥의 길

팔복동(八福洞). 이름이 참 좋다. 인생 100년에 오복(五福)을 누리는 사람이 극소수인데 여덟 가지 복을 주는 마을이 있으니! 전주시 북쪽에 있다. 황방산을 주산으로 전주천을 명당수로 하는 길지이다. 지금도 옛 철길이 그대로 있다. 전북의 도청소재지인 전주의 수구(水口)로서 재물 기운이 들어오는 통로가 분명하다.

필자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이곳에는 많은 공장들이 있었다. 코카콜라, 문화연필, 전주제지, 백양메리야스, 삼양사, 호남식품... 모두 유명 기업이다. 무슨 행사의 일정 가운데 하나였던지 고등학교 한 학년 720명이 교련복을 입고, 코카콜라 전주공장을 견학 갔다. 공장에서 콜라 한 병씩을 주었다. 콜라의 진한 맛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코카콜라 공장은 사라졌다. 그 많던 유명 기업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전국 제1의 산업단지로 크지 못하고, 쭈그러들어 한쪽에 “문화예술공장”이 옛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코카콜라 공장을 이야기하려던 것이 아니다. 고속버스 진입 동선이 팔복동과 추천대교를 활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속버스가 팔복동을 지나칠 때 문화연필공장이 늘 눈에 띄었다. 건물 지붕 뾰족한 연필 모양의 기둥 장식들 때문이었다. 일부러 눈을 돌리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동화 나라 건물’이었다. 향나무들이 담장을 무겁게 에워싸고 있었지만, 지붕 위 ‘뾰족 연필’들은 이곳이 문화연필임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전주의 작은 ‘랜드마크’가 되었다.

가끔 삼례 직장에서 전주 시내 쪽으로 시내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그쪽을 쳐다본다. 내려서 한번 들려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지금 그곳을 가봐야 만날 사람도 없다.

1990년대 중엽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한국풍수의 허와 실’이란 글을 모 일간지에 장기 연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주문화연필 박덕신(1944~) 대표께서 점심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박 대표님과는 몇몇 지인과 드물게 저녁모임을 하던 사이였다. 연배가 높아 좀 어려워하던 분이었다. 시간에 맞추어 식당에 갔더니 예상과 달리 박 대표님과 필자 둘만의 만남이었다. 숫기가 없는 필자로서는 더욱 어려운 자리였다. 침묵의 어색이 중간중간 길게 이어질 즈음이었다. 박 대표님이 자신의 ‘이력’을 말씀한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서반어(스페인어)를 전공하였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준비하던 차, 문화연필과 인연을 맺었다. 유학의 꿈을 접고 지금의 문화연필 대표로 하고 있다.(...)’

이어서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하신다.

“김 교수, 한국에 독문학 교수가 몇 명이나 됩니까?”

“정확히는 모르나, 독일의 독문학과보다 한국의 독문학과 수가 더 많으니 몇백 명은 될 것입니다.”

“그럼, 김 교수가 한국의 독문학자들과 실력을 비교한다면 어느 수준이나 될 것 같아요?”

“예... 한국에서 박사를 한 사람들도 많고, 독일에서 박사를 취득한 사람도 있는데, 저는 독일에서 하였으니....아마도 중간쯤은 되지 않을까요?”

잠시 말이 없다가 말씀하신다.

“풍수로 글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후 필자는 실거주지를 전주에서 순창·서울로 바꾸는 바람에 더이상 뵐 기회가 없었다. 몇 년 후, 군산대 전형원 교수(행정학)가 필자의 연구실을 찾았다.

“박덕신 대표님이 외국 출장 중 풍수서 몇 권을 샀는데, 김 교수에게 전해달라네.”

필자가 독일문학에서 풍수지리로 전공을 바꾸던 계기였다. 만약 독문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계속)

글 = 김두규 우석대 교수(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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