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 문일민, 안혜순 선생
12월의 독립운동가 - 문일민, 안혜순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3.12.0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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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안혜순 선생 부부

 문일민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함종의 함일학교에서 수학하였고, 평양에서 물산위탁 판매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다음, 그 해 7월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 뒤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에 참가하여 한족회의 명령으로 평양에 잠입하여 애국청년회의 연락과 조직 강화 활동을 벌이고 남만주 본거지로 복귀했다. 

  1919년 12월 선생은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여 행동대 대원으로 활동했고, 대한광복군총영 평양 폭탄특공대 소속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2월 광한단·대한독립단과 함께 평양 북금융조합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탈출했다. 이후 상하이로 간 그는 흥사단·대한교민단·대한민국임시정부·민족혁명당 등에 참여하면서 친일파 처단 공작을 주도하기도 했다. 1934년 4월에는 일본에 협조적이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프랑스 영사 암살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중국국민정부를 따라 관내지역을 유랑할 때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임시정부가 쓰촨성 충칭에 안착한 뒤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도 출석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1943년 4월 2일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에, 1944년 10월 23일에는 참모부 참모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충실히 앞장섰다. 

  안혜순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오빠와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1928년 중국 베이징에서 문일민과 결혼하여 상하이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편을 도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부인들로 구성된 ‘한인애국부인회’에 참여하였다. 특히 1935년 2월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 정기총회를 주도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상하이에 거주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 문일민의 내조와 임시정부 관련 활동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선생은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남편 문일민의 지원 등에 무척 고생을 많이 했으며, 비록 여성이었지만, 강한 의지로 역경을 헤쳐가면서 가족들의 생활을 이끌어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1940년대 문일민과 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쓰촨성의 충칭까지 따라갔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3남 1녀를 데리고 국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 거주하다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문일민을 다시 만났던 것이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문일민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안혜순 선생에게는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문일민·안혜순 선생의 독립운동 헌신에 대해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혜순 선생은 총칼과 폭탄을 들고 직접 투쟁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하는 남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통해 국권회복을 지향하는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더구나 어린 자식 등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애국애족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과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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