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나는 누구인가?
[독자수필] 나는 누구인가?
  • 정석곤 수필가
  • 승인 2023.09.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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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곤 수필가

 전주에서 출발할 때 장맛비가 강원도 오대산국립공원은 미리 다녀갔는지 쾌청했다. 상원사(上院寺)에 도착했다. 월정사(月精寺)에서 9.7km쯤 되는 한국 100경 중 하나인 선재길을 걸어 올라가면 상원사다. 집에서 싸간 도시락 점심은 시장이 반찬이었다.

  급경사인 여러 계단을 올라가 청풍루 화현문에 들어섰다. 뚜껑이 거울로 된 작은 강단이 한가운데에서 가로막았다. 강단 앞쪽엔 “이 뭣고? 나는 누구인가?”, 뒤쪽엔 “Who am I?, 아시수(我是誰)?”라 씌어 있었다. 트로트 가수 김용임이 부른 <거울 앞에서> 노래는 “거울 앞에 앉았다”라 시작하지만, 난 강단 앞에 섰다. 그 속에 내 얼굴이 들어있고 바닥에는 부처님 화상이 나타났다. 난 기독교인이라 예수님을 떠올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산 속 얼굴이라 꼼꼼히 살폈다.

  이마는 청년 때부터 주름이 몇 개 있었지만, 一(한일) 자로 깊게 팬 게 더 늘었다. 조금 빠진 양 눈썹 사이는 1(일)자 주름이 두어 개 올라왔다. 눈두덩은 두꺼워지고 흐릿해진 눈동자 밑은 올라와 늘어져 있다. 인중(人中)과 커진 양 콧구멍에서 볼쪽으로도 깊게 골이 파였다. 아랫입술 밑은 군데군데 쑥 들어갔다. 턱 아래는 두 귀밑에서 내려온 주름과 합쳐 층을 만들며 내려갔다. 낯선 얼굴 같아 사진에 담았다.

  코로나19 전에 와서 걸었던 전나무 숲이다. 그때 너무 좋아 오늘도 천년의 숲을 맑은 냇물 소리를 들으며 바람과 같이 걸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일흔 고개를 넘어온 ’나는 누구인가? ‘를 생각하면서 ···.

  파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믿음직하게 보였다.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보란 듯이 버텨왔다. 탐방객들에게 기쁨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걷다 보면 고목이 속을 텅 비우고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것과 누워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바로 전나무였다. 고목은 ㅤ썩은 속을 비우면서도 전나무숲의 나이를 말하고 있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게다가 몸속까지 '포토 존'으로 내주며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다람쥐 가족들도 좋아 다 나와 가까이서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옅은 잿빛 바탕에 밤색 굵은 줄무늬 옷을 입었다. 탐방객들을 반기며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 되라고 말한 것 같았다. 다람쥐들은 잠깐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려 ’명상의 숲‘에 찾아온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빨리 길들여지려 애를 썼다.

  탐방객들은 숲길을 걷다 양쪽 긴 의자에 앉아 골짜기에서 졸졸 흘려 내려온 물에 발을 담그며 잠깐 쉬고 있었다. 나도 줄을 서 기다리다 족욕을 했다. 물이 진안군 냉혈 곁 냉천冷泉처럼 차가워 발을 담갔다 들기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아침부터 쌓인 피로가 싹 풀려 기분이 상쾌했다. 골짜기 물은 몰려온 자마다 피로해소제가 되어 숲길을 걷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숲길을 찾는 이들에게 죽어서까지 즐거움을 선물한 전나무들, 반기며 길들여지려는 다람쥐들, 발의 피로를 풀어주는 골짜기 물을 보며 ’나는 누구인가? ‘를 되돌아봤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거로 만족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해를 안 끼친다고 하지만, 마음의 항아리가 비우지 않아 남에게 베풀지 못하며 살아왔다. 오늘 걸은 숲길의 전나무와 다람쥐 그리고 골짜기 물처럼 살 수는 없을까? 얼굴은 일그러지지만 남은 생은 그들을 흉내라도 내면서 살고 싶다. 내 맘의 항아리가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으면 좋겠다.

 
 정석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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