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6> 내 삶의 동화 같던 순간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6> 내 삶의 동화 같던 순간들
  • 장은영 동화작가
  • 승인 2020.11.24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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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무렵이면 운동화를 신고 천변으로 나간다. 나이 탓인지 운동 부족인지 모르지만, 계단을 오를 때면 무릎이 시큰거리고 쉽게 지치는 게 신경이 쓰인다. 오늘은 운 좋게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밝게 빛나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석양이 얼마나 고운지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 한 곡이 들려온다. 어니언스의 ‘편지’다. 돌아보니 초로의 아저씨 허리춤에 매달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멀어져 가는 노래 소리 따라 오래전 기억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남녀 합반이 되었다. 바뀐 교실 풍경에 쭈뼛거리기도 했지만 어색함은 잠시였고 우리는 함께 어울려 노느라 바빴다. 다방구, 오징어, 공기, 고무줄놀이를 하느라 교실과 복도, 운동장 가릴 것 없이 뛰어다니며 깔깔거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서 열리던 리사이틀이다. 지금처럼 학교가 끝나도 따로 학원이나 공부방을 가지 않던 우리는 교실에 남아 함께 놀았다.

  “동남아에서 방금 순회공연을 마치고 온 아무개입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면 손에 마이크 삼아 뭔가를 쥔 아이가 나와서 유행가를 멋들어지게 불러댔다. 슬픈 노래를 부를 때는 눈을 살짝 감고 감정을 쏟아서, 흥겨운 노래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마도 학교 옆에 있던 ‘신태인 극장’에서 연예인들이 펼쳤던 공연을 흉내 냈던 것 같다.

  우리들이 자주 불렀던 노래는 ‘님은 먼 곳에’, ‘커피 한 잔’, ‘님과 함께’ 같은 가요였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어니언스가 부른 ‘편지’를 좋아했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흐르며언’을 부를 때쯤이면 가슴에 콕콕 박히는 알싸한 아픔 같은 전율이 느껴졌다. 처음에 혼자 부르기 시작해도 나중엔 함께 목청껏 소리치며 부르던 노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의기투합했다.

  그 해 가을 소풍 때 장기자랑 시간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 ‘편지’를 우리 반 남자애가 불렀다. 늘 장난만 치고 까불던 아이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아이 앞에서 전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어디를 봐도 그 애가 눈에 보였고 가슴이 콩닥거리며 얼굴이 빨개졌다.

  하루는 친구 집에 가는 길에 그 애를 만났다. 골목이 많아서 헷갈려하고 있는 내게 그 애는 다정스럽게 말했다.

  “내가 데려다 줄게.”

  그날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 아이와 함께 나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줘서 고마웠다는 고백도 했다.

  “내일 학교 끝나고 교실 뒤 플라타너스 나무 앞에서 보자.”

  친구네 집 앞에서 그 애가 나를 보고 웃으며 건넨 말에 나는 혼자 온갖 상상을 했다. 어쩌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도 설치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는 어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종례 후에 후다닥 가방을 챙겨 교실 뒤로 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늘 그렇듯이 함께 놀던 친구들이 모두 그 곳에 모여 있었다.

  “오늘은 냇가에 가서 놀자.”

  여느 때처럼 신이 나서 앞장서가는 그 애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아이를 향한 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된 나는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 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사귈래?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그 애는 편지를 내 손에 쥐어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 편지를 받지 않고 돌아섰다.

  이제와 그 때를 생각하니 아득한 꿈결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읽었던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하다. 함께 했던 친구들도, 그 아이도 이제 중년의 문턱을 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서툴고 힘겹게 지나고 있을 친구들에게 힘내라는 나만의 ‘편지’를 보내고 싶다.

 

 글 = 장은영 동화작가

  

 ◆장은영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 <설왕국의 네 아이>, <바느질은 내가 최고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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