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562> 천하의 잡놈겉으니라고
가루지기 <562> 천하의 잡놈겉으니라고
  • <최정주 글>
  • 승인 2003.09.04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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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옹녀의 전성시대 <38>

"거그서 병든 서방님과 산다고 허까? 비록 병언 들었을망정 서방님이 있다고 허면 지놈이 어쩌겄어?“

“서너쪼금도 못 가서 들통이 날 것인디, 그짓꼴얼 헐 것이 멋이다요? 그냥 여그저그 주막에서 굴러 묵든 계집이 거그서 사는갑드라고만 말허씨요.”

그렇게 일러놓고 옹녀 년이 주막을 나왔다. 혹시 정사령 놈이 따라오지 않은가, 뒤를 돌아보았으나 벙거지는 보이지 않았다.

‘흐참, 보챌 때는 곧 바로 따라나설 것 같드만, 안 따라오네.’

옹녀 년이 중얼거리며 삼거리를 벗어나 작은 내를 건너 막 산내골로 들어섰을 때였다. 길가 잡목 사이에서 사내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질겁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가 고개를 드니, 강쇠 서방님이었다.

“아니, 서방님. 여꺼정 어쩐 일이시래요?”

“임자가 걱정이 돼서 집안에 있을 수가 있어야제.”

강쇠 놈이 하얗게 웃었다.

“걱정도 팔자요이. 안 그래도 이년언 가심이 벌렁거리는디.”

‘임자 가심이 왜?“

“잘 난 서방님얼 탐내는 계집덜이 많은깨 글제요. 인월 주막의 주모는 허리 낫기만을 학수고대허고 있고라, 정사령의 마누래도 눈에 불얼 켜고 찾고 있습디다.”

“그래? 괜찮헌 계집들이었는디.”

강쇠 놈이 눈을 번쩍이면서 인월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천하의 잡놈겉으니라고, 나허고 살풀이 헌 것이 얼매나 됐다고 펄쌔부텀 껄떡거리는구만이, 하고 옹녀 년이 중얼거리는데, 강쇠 놈이 화들짝 잡목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왜라? 서방님.”

옹녀 년이 멀리 인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쪽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벙거지가 따라오는구만.”

“벙거지가라?”

옹녀 년이 다시 인월 쪽을 돌아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벙거지 하나가 논두렁 담벼락길을 막 돌아나오고 있었다.

“저 놈이 저 죽을지 모르고 따라오고 있소이. 어뜨케 허끄라?”

“임자넌 그냥 모른체끼, 집으로 가소. 내가 뒤에서 바람만 바람만 따라갈 것인깨. 방안에 들이고 판만 벌여놓소. 나머지넌 내가 알아서 헐 것인깨.”

“호호, 속창아리 없는 놈겉으니라고. 이년언 먼첨 가요이.”

강쇠 놈이 잡목숲 속으로 몸을 깊숙이 숨겼고, 옹녀 년이 히죽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주모한테 주막에서 굴러먹던 계집이 산내골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서둘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사령 놈은 꼭 그만큼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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