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심사평 ‘기억, 그 유랑의 재구성’
[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심사평 ‘기억, 그 유랑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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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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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귀선 문학평론가·문학박사

고뇌의 시간들을 꼼꼼히 읽었다. 무난한 작품도 엿보였으나 아쉬운 작품 또한 없지 않았다. 수사와 묘사의 과정을 통한 미학적 접근이라든가 성찰 또는 울림의 부재는 차치하고 진부한 표현들이 산재해 있었으며 일부 작품은 맥락이 틀어지거나 산만하였고 구성과 개연성 같은 기본적인 부분의 미숙도 엿보였다.

한 편의 詩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결절점이 필요하듯 수필 또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인접 장르의 수용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수사적 변용과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성찰에 즈음한 철학의 확산까지도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상당한 수준의 작품도 눈에 띠었다. 그러나 어휘의 부림에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각각의 어휘에는 관습의 보편성만이 아닌 상상과 이면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작품에 선택된 어휘와 어휘의 맞물림과 어우러짐은 작품의 깊이를 좌우하기도 한다.

빤한 것 같지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퇴고의 과정이다. 퇴고의 중요성은 수백 번 언급해도 부족하지 않다. 깊이는 곧 과정이기 때문이다. 퇴고의 최종단계에서 자신의 작품을 음독함으로써 오탈자는 물론이고 된소리의 겹침이라든가 불필요한 어휘의 중복까지도 살펴야 한다.

올해 수필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300여 편이다. 응모작 중 10편이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본심에 올랐다. 심사자는 고심 끝에 10편 중 <호박꽃이어라>, <새들의 행간>, <슬로우슬로우 퀵퀵> 3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최종심에 올린 응모작은 대체로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먼저 <호박꽃이어라>에서는 낯익은 표현이 더러 있었으나 어휘의 능숙한 부림이 눈에 띠었다. 구어체로서 감탄의 의미를 내장한 종결어미 취사의 제목 또한 주제와의 호응을 무난하게 이끌어 내고 있었으며, 늦깎이 화자의 꿈과 호박 속 씨를 병치하여 희망을 심겠다는 결미 또한 무난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확장이 없어 아쉬웠다. 다음으로 <새들의 행간>은 덩굴장미에 둥지를 튼 새의 모성과 생태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언급하는 작품으로 알레고리적 수사와 묘사가 두드러졌으나 어휘의 적확성과 주제의 구현이 미약했다. 끝으로 <슬로우슬로우 퀵퀵>은 도입의 첫 어휘를 부사어로 차용하여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제와의 연계를 암유하고 있어서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춤바람’이라는 부정적 소재를 삶의 이야기로 승화시킴으로써 좋은 것만을 써야 한다는 수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춤바람에 따른 어머니의 한이 감정의 절제미를 거쳐 중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춤바람은 골목을 찾아드는 바람 같은 것이고 그것은 지구별을 움직이는 시원으로 기능하면서 지금을 있게 한 운율이기도 하다는 확장 또한 무난하였다. 더하여, 70년대 산업화 초기 중동 근로자 가족사가 고명처럼 적절히 이미지화 된 장면이라든가, TV앞에 앉아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늙은 아버지 현상 이면에 적층된 인생무상에 대한 사유가 글의 깊이를 더했다. 하지만 불필요한 설명과 지나친 관념은 옥에 티라 하겠다.

늘 그렇듯 예심보다 최종심에서의 숙고가 길었다. 특히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 중 <호박꽃이어라>와 <슬로우슬로우 퀵퀵> 어느 작품을 당선작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상당한 시간 동안 고민을 했다. 신춘문예 특성상 한 사람만을 선해야 하는 고충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심사자는 결국 수필문학의 확장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서은영의 <슬로우슬로우 퀵퀵>을 당선작으로 선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함께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계속 정진하기 바라며, 아깝게 낙선한 분들께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배귀선(문학평론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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