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현충시설 - 3·1운동 기념비(임실군)
우리고장 현충시설 - 3·1운동 기념비(임실군)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03.2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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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중순, 전북 임실군에서는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임실읍내와 청웅면 등 군내 곳곳에서 4월 초순까지 한 달동안 계속해서 산발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오수보통학교 교사인 이광수는 서울에서 천도교 대표 오세창을 만나서 만세운동에 관한 지시를 받고 내려왔다.

3월 10일 10시경 교사 이광수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으나 일본인 교장과 다른 교사들의 만류로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만세운동은 3월 12일 임실읍 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2일 시장 한복판에서 퍼진 만세 함성은 모여든 장꾼들이 합세하며 그 크기를 키웠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며 시위는 더 격화되었다. 이 같은 오수면과 임실읍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은 청웅면, 지사면, 강진면 등 인근 면을 거쳐 남원, 군창, 장수 등 인접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한편 오수 지역의 유지인 이기송 등은 3월 23일 오수 장날을 기하여 다시 한번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일시에 8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을 이끌던 이기송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몰려갔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자 기세에 눌린 일본인 순사는 이기송을 석방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불어났으며 시위군중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점령하였다. 이날 저녁 남원 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병력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임실에서 이러한 시위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분들만도 80여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한영태, 김영원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동아일보사에서는 독립만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의 애국심 함양과 함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건립위원회와 협력하여 1977년 이 비를 세웠다.

 ▲위치=전북 임실군 이도리 이도리 851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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