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봄, 희망의 햇살
3월의 봄, 희망의 햇살
  • 서거석 더불어교육혁신포럼 이사장/前전북대 총장
  • 승인 2021.03.22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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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햇살은 2월과는 분명 다르다. 따스한 봄 햇살을 머금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녹색 기운으로 움트는 3월은 시작이자 설렘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봄소식을 알리는 작은 생명의 몸짓은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나의 몸을 일깨운다. 해가 바뀌는 1월 1일을 새로운 시작이라 말하지만, 평생 학생들을 가르쳐온 나에게는 3월이 새로운 시작이다. 하지만 설렘이라 쓰고 두려움이라 읽기도 한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나머지 단추까지도 어긋나기에 매번 반복되는 3월의 낯선 시작은 조심스럽다.

그토록 원했던 봄이 왔지만, 겨울을 보내려니 자못 섭섭하다. 3월을 생각하면 마냥 설렘만 가득한 건 아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야속함과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다. 삶의 출발선이었던 3월. 나에게만 더디게 왔던 봄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셨다. 우리 가족은 집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외아들이었던 나는 소년가장이 되어 여름이면 아이스케끼통을 메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겨울이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학비는 고사하고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했다.

책가방 대신 나무지게를 지고 남부시장으로 가서 섶나무를 팔았다. 남부시장 식당 아주머니들은 나를 ‘나무꾼 도령’이라고 불렀다. 어떤 분은 자신의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가 국밥을 가득 말아주기도 했다. 국밥 한 술, 두 술에 집에 있는 두 여동생이 뽀얗게 떠올랐다.

아침에 지게를 지고 길을 나서다 등교하는 친구들을 보았다. 단정하고 맵시있는 교복, 빛나는 모자의 교표! 남몰래 숨어서 바라본 그날 아침의 광경. 지게를 메고 산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무심코 올려다본 그해 3월의 햇빛은 유독 찬란했다.

1년 후 친척 어른께서 한 학기 등록금을 주셔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1년 더디게 온 봄이었지만, 학교로 향하는 길은 내내 행복했다. 하지만 2학기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인 전주역 앞 2층 건물에 신문사 지국을 찾아갔다. 까만 안경을 쓴 지국장이라는 분은 나를 내쫓았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더는 길이 없었다. 나에게 왜 신문 배달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꼭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새벽 4시 30분에 집을 나서 역으로 향했다. 화물열차에서 신문을 받아 겨드랑이에 끼고 이 집 저 집을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동네 사나운 개가 쫓아오기도 했고, 겨울에는 얼어서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견디었다. 그렇게 매일 3시간 동안 신문을 돌리고, 집에 돌아와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

교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얇은 햇볕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시린 세월이 반복되었다. 그런데도 가난의 존재는 쉽게 날 떠나지 않았다. 가난의 무게에 짓눌렸어도,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공부에 더욱 매달렸고, 교수가 되었고, 대학 총장이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3월의 찬란한 봄빛에도 자신에게만 더디게 오는 봄을 기다리며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로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들. 낯선 나라에 와 불안한 마음으로 자녀를 입학시킨 이주여성들. 부모로부터 외면당한 아이들. 이들이 용기와 의지를 잃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희망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3월의 봄, 우리 함께 희망의 햇살을 맞이하자.

서거석<더불어교육혁신포럼 이사장/前전북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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