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옷감
왕비 옷감
  • 박은숙 원광대 부총장/원광대 사범대학 교수
  • 승인 2021.02.2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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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맡은 보직은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나날이었다. 개교 이래 첫 여성 보직자라는 축하 인사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2013년 5월 초 오후 5시경, 서울 출장을 마치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어서 터미널은 매우 붐볐다.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날도 나의 업무는 과중하게 느껴졌으므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인파 속에서 모자를 쓴 고운 자태의 P 교수님이 보였다. 80세를 바라보는 P 교수님은 부피가 큰 두루마리를 안고 있었다. 지금처럼 백 팩이 유행하지 않을 때여서 백 팩을 맨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 보이기도 했다. 두루마리를 두 팔로 안으려고 백 팩을 메고 왔다고 하셨다. P 교수님과의 인연은 교수님이 학회 회장을 맡던 날, 나에게 총무 역할이 주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주어진 일은 많았지만 교수님의 전공에 대한 열정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넉넉한 인품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이 예약한 차는 내 차보다 먼저였다. 버스가 도착하여 출입문에서 교수님께 두루마리를 안겨 드렸다. 고속버스 회사 직원은 좌석이 하나 남는다고 외쳤다. 출입문 맨 앞에 줄서서 기다리던 신사분이 나에게 좌석을 양보했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그분은 ‘어머님과 헤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에 올랐다. 교수님 좌석은 맨 앞자리였고, 내 좌석은 맨 뒷자리였다. 버스에 타자마자 교수님 옆자리에 앉은 분이 일어나더니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또 사양했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양보하며 맨 뒷자리로 향했다. P 교수님과 나는 그 버스에서 이미 모녀지간이 되어 있었다.

두루마리를 선반에 올리려는 순간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니.’. 두루마리가 선반 길이보다 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루마리를 안고 의자에 앉으니 얼굴까지 닿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든지 힘을 주어 두루마리를 비스듬히 안고 있어야 했다. 수 시간을 이 자세로 가기에는 무리였다. 피곤 하실 테니 주무시라고 했더니 만날 기회가 없으니 얘기나 하고 가자고 하셨다. 두루마리는 곧 있을 전시회에 왕비 두루마기를 재현할 옷감이며, 왕실 옷은 짜임 자체가 달라서 옷감을 특별 주문한 것이라고 하셨다. 왕비는 키가 컸을 것 같은가 작았을 것 같은가, 날씬했을 것 같은가 퉁퉁했을 것 같은가를 물으셨다. TV 사극에 나오는 왕비들은 참 예쁘고 날씬하더구만. 키 크고 날씬해야 왕비로 간택되지 않았을까? 옛날 사람들은 키가 대체로 작았으며, 왕실은 음식이 풍부해서 체중은 상당히 나갔다고 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옷을 작게 만들면 기품이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크게 만들면 고증에 오류가 있는 것이어서 딜레마에 빠진다고 하셨다. 왕비 옷감을 안고 나는 교수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는 고속버스들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옷감을 고속버스 의자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교수님의 두 번째 ‘아니.’가 들렸다. 나는 핸드백을 걸친 왼손으로는 두루마리를 안고, 오른손으로는 교수님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드디어 차례가 되어 교수님과 동시에 옆 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교수님의 세 번째 ‘아니’가 들렸다.

고속도로 정체가 심해 새벽 2시가 지나 전주에 도착했다. 교수님은 나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다. 택시를 타고 댁에 도착하여 교수님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옷감을 어디에 놓을지 두리번거렸다. 거실 바닥에 놓아야 하나, 소파에 놓아야 하나, 식탁 의자에 놓아야 하나, 아니면 작업하실 방에 들여놓아야 하나? 망설이다 교수님께 여쭈었다.‘옷감 어디에 놓을까요?’교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데나 놔.’

교수님이 정성 들여 준비하신 차를 대접받고 예쁜 손수건 2장을 선물로 받았다. 그날 이후 나의 업무 수행은 참으로 수월했다. 왜냐하면 업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왕비 옷감 모시듯 하였으므로.

박은숙<원광대 부총장/원광대 사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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