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4> 고려 왕실의 다례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4> 고려 왕실의 다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1.02.0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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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12세기),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고려 때 차는 중국 송대의 영향을 받아 단차(團茶)가 유행했다. 차의 재배와 공급이 이뤄지도록 ‘다소(茶所)’를 설치했다. 사원 주변에는 차를 제조하여 받치던 다촌(茶村)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다소촌이라고도 했다. 이렇듯 고려는 차를 직접 생산하였으며 왕실과 사찰의 각종 행사와 하사품으로 차가 활용되었다. 황실용 차를 만드는 어차원(御茶園)은 10세기경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차는 약(藥), 향(香) 등과 함께 왕의 하사품으로 각각의 신분에 따라 지급하였다. 왕실과 승려, 문사, 일반 백성에까지 보급이 되었다. 차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도 개경에는 ‘다점(茶店)’이 형성되었다. ‘다방(茶房)’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조정의 다례를 거행할 때 주관하도록 했으며, 왕의 순행(巡幸)이나 명찰(名刹) 참례 등에 동행하면서 다례를 받들도록 했다. 즉 ‘다군사(茶軍司)’를 두어 외부 행차에는 차를 끓이기 위한 화로(火爐)와 차를 나눠 메고 갔다. 다방 관원은 이밖에도 궁궐에서 거행하는 다양한 다례에서 진다(進茶)의식을 주관 했다.

  설날의 원회(元會), 즉 정월의식에서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다음과 같은 다례도 있었다. “… 다방에서 먼저 차를 올리고 다음에 술을 땅에 뿌린 후 태자와 영공, 재신들은 왕 앞으로 가서 동쪽에 가까이 서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이렇게 차, 술 등이 차례로 절차에 따라 행해졌다. 왕자가 태어났을 때 축하하는 의식이나 백관들을 위한 연회 의식에서도 다례가 행해졌다.

  특히 백관연회에서는 관직에 따라 자리를 배석하고 다방에서 차를 주관하며 의례 중간에 “음(飮)”이라고 외치면 차를 마셨다. 이 과정에서 음악이 있었고 차와 술, 향 등이 차례로 올려졌다. 왕실의 의례만이 아닌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 왕과 대신들 사이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었다. 성균관에서는 정기적인 다례가 고려 말까지도 있었다. 다음은 고려 초 왕실에서 차가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왕께서는 공덕재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를 갈고,

  맥차(麥茶)를 연마한다고 하시는데, 전하의 몸이 피로해질까 염려됩니다.

 

  이는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성종 원년(982) 왕명에 따라 올린 「시무 28조」 중 2조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공덕을 쌓기 위해 승려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법회에서 왕이 직접 차를 준비했던 것 같다. 맥차는 이른 봄 어린 찻잎을 따서 만든 아주 귀한 차로 단차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최승로는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어 재를 베푸니 부처의 신령함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에 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몸소 차를 가는 것은 왕의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왕이 몸소 차를 준비하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고급 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고달픔을 간접적으로 말한 듯하다. 그 후 성종 8년 최승로가 세상을 떠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그는 누차 사직을 올렸으나 그럴 때마다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병으로 죽으니

  그의 나이 63세이다. 왕이 슬퍼하여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로 추증했다.

  부의로 베 1,000필, 밀가루 300석, 갱미 500백, 유향 100냥, 뇌원차 200각,

  대차 100근을 내렸다.

 

  하사된 뇌원차는 고려에서 만든 단차이다. 이렇게 왕실에서 주관하는 의례에서는 차를 공양하는 절차가 있었다. 이러한 예법은 자연스럽게 민가에 유입되어 제사에 차를 올리는 풍속이 되었다. 차례라는 말도 차츰 이렇게 유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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