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흰소의 해, 상서롭게 쏟아지는 하얀 눈
신축년 흰소의 해, 상서롭게 쏟아지는 하얀 눈
  • 정영신 전북소설가협회 회장
  • 승인 2021.01.12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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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축년(辛丑年) 새해다. 상서로운 하얀 소의 해다. 신정 연휴가 지나자 체감 온도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면서 전국 곳곳에 폭설이 내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하얀 눈에 덮인 온 산야가 시리지만 아름답다.

 하얀 눈, 하얀 소의 해, 모두 흰색의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신축년(辛丑年) 정초(正初)다. 신축년이 흰 소의 해이듯이, 매 해의 색상은 하늘의 이치를 담았다는 10간(干)에 의해 결정된다. 이 10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에서부터 두 개씩 짝을 지어 갑과 을은 청색, 병과 정은 붉은색, 무와 기는 황색, 경과 신은 백색, 임과 계는 흑색을 상징한다. 그래서 신축년은 흰 소의 해인 것이다.

 이 흰색은 신화적으로도 출산과 상서로운 기운인 서기(瑞氣)를 상징하며, 빨강과 검정색과 함께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벽사(闢邪)의 색이다. 민속신앙에서는 동·서·남·북·중앙의 오방 중 서쪽이며, 계절은 가을이고, 신성함을 의미한다. 충남 부여의 능산리 고분에서 백제시대의 백호도(白虎圖)가 발견되었는데, 이 백호 역시 신성함, 신령함을 상징한다. 또 흰색은 밝음과 깨끗함, 절개와 결백, 충절과 청렴, 순수함과 고결함을 의미한다.

 신축년 새해 벽두, 함박눈이 쏟아진다. 눈은 비와 함께 하늘이 인간에게 이익을 주려고 내리는 길상(吉祥)의 자연물이다. 그래서 산머리에 흰 눈이 쌓인 채 늦은 봄까지도 풀풀 은빛 설화가 허공에 날리는 백두산(白頭山)은 신령한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이며, 눈은 또 그 빛이 희고 보드랍기 때문에 맨 처음 내리는 첫눈을 받아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그 피부가 고와진다고 믿었다. 또 눈은 ‘눈사람, 눈싸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순수한 동심과 순결을 상징하며, 눈은 그 흰빛으로 인해 결백과 의리, 장수와 풍요를 의미한다. 그러나 눈은 그 차가운 성질 때문에 상반된 의미로 고난과 시련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두운 방 안엔/바알간 숯불이 피고,//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이제 소리 없이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인가.

 1955년 현대문학에 실린 김종길(1926~2017)시인의 <성탄제>라는 시이다. 홍역 등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그 어려운 시절, 의료시설도 경제적인 여력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 힘든 시절에, 힘없이 늙으신 할머니는 그저 점점 숨소리가 작아져 가는 아이를 지키고 있을 뿐이고, 그래도 가장인 아버지가 한 길 눈 속을 헤치고 해열제인 산수유 열매를 따 오셨다. 그 산수유 열매의 약성도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 험한 눈 속을 헤치고 산수유를 구해 오신 아버지의 정성과 사랑, 헌신, 그리고 아버지의 옷자락에 흠뻑 달라붙어 뜨거운 볼을 부벼주던 시린 눈뭉치 때문에 아이는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차가운 눈이 발열로 상기된 볼을 부비며 아이 몸의 열을 내려 목숨을 잇게 한 것이다. 이 시에서 아버지가 병든 자식을 위해 힘겹게 헤치고 가신 쌓인 눈들은 고난과 시련을 의미하지만, 긴 옷자락에 달라붙은 그 차가운 눈들은 결정적으로 아이의 발열을 사라지게 해준 신비로운 명약이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도 가난한 홀어머니는 가사가 기울어 집을 처분하고는 모처럼 찾아온 아들에게 내색하지 않은 채 옷궤를 윗목에 놓고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재우고 아들과 함께 어두운 눈길을 걸어 읍내에서 새벽차를 태워 보낸다. 본인 한 몸을 누일 작은 거처도 없는 늙은 어머니는 그 까만 새벽에 하얀 눈 위에 남겨진 아들의 발자국을 의지해서 다시 되돌아온다. 세월이 흐르고 경제력이 없는 어머니를 원망하던 아들은 그 새벽에 험한 눈길을 혼자서 힘들게 되돌아가신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며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 어머니의 ‘눈길’은 거처할 공간도 없이 홀로 서럽게 되돌아오신 가난한 홀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의 공간이지만, 먼 후일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눈물로 참회하는 그 새벽 어머니의 눈길은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담긴 사랑과 화해의 공간이다. 이처럼 눈은 고난과 시련을 사랑과 화합으로 만드는 신비로운 자연물이다.

 신축년 새해, 하얀 소의 해에 펄펄펄 하얀 함박눈이 쏟아진다. 비록 아직도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어려움이 산재하지만, 제발 올 한 해는 상서로운 저 함박눈을 닮은 신비롭고 희망적인 일들만 가득하기를 기원해 본다.

 정영신<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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