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 최정호 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 승인 2021.01.0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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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지인의 부탁을 받아 레바논 의사의 논문을 살펴보았다. 나의 오랜 탐구 주제인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한 논문이라 나에게도 공부되는 기회였다. 그 객관적 기준을 찾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헛되어 보인다.

  우리는 아름다운 꽃을 보고 아름다움의 본질 혹은 속성이 그 꽃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미학’을 공부하다 보면 그렇게 결론이 간단하지 않았다. 그 결론이 진리라면 개미나 잠자리가 보더라도 동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꽃의 아름다움은 아름답다고 여기는 우리의 마음과 관계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논쟁 중이라 결론이 쉽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법칙’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객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사람들은 주관적인 판단을 쉽게 주관적으로 객관화시켜 놓고 이를 객관적이라고 둘러대고는 모른척한다. 사람들의 논리가 변호사의 논리처럼 진실에 봉사하기보다는 승리를 위해 이용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수처’ 논의로 지난 한 해가 시끄러웠지만 아직도 논쟁 중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존의 ‘검사’제도가 자신에 유리한 사람들과 불리한 사람들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닭을 잡아먹는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튀김이든 양념이든 각각의 취향이고 이 판단이 자신에게 중요하지도 않고, 자신의 ‘이익’에 결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닭이 한 마리만 남아 있다면 이는 ‘공수처’ 문제보다 심각해질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또 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사면’에 관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나는 오래전에 바로 이 지면을 통해 이러한 ‘사면’ 논의를 예측한 바 있고 이를 해석한 바 있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면’은 대통령이 갖는 특별한 ‘시혜권’인데 이는 대통령을 ‘법’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로 인정하는 우리의 헌법체계에 존재하는 ‘모순’때문이다. 삼권분립의 정신에 위배되는 초법적 권리를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법살인, 전관예우, 제 식구 감싸기 등 판. 검사들과 관련한 구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형상 법치주의의 탈을 쓴 공화정을 유지한다. 그래서 삼심제도를 유지하고 재판을 존중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태도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우리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통하여 ‘사면’의 폐해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죄악에 대한 관용은 미래의 범죄에 대한 ‘용기’를 주는 일이다. 전두환에 대한 관용은 수많은 또 다른 전두환을 배출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군부 쿠데타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판명된 군부세력과 그 수괴가 ‘사면’되어 잘살고 있고, 경호까지 받고 있는 현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더군다나 후임 대통령이 전임의 사면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나간다면 대통령들의 앞날은 징죄의 염려가 없는 초법적 권리가 보장되는가?

  국민통합? 증거와 증인에 의한 삼심의 사법체계에서 유죄가 확정된 범죄를 무효로 하는 것이 통합을 의미한다면 무엇을 위한 통합이고 화합인가? 법이 무력화되고 심판이 무효화되는 비법천지가 화합이고 통합인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특정할 수 없는 것처럼 선악의 기준도 측정하기 어렵다. 질의 문제를 수량화하는 것이 어렵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중력의 법칙은 지구의 어디에서나 아니 우주 어느 곳에서나 일정한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에서 공수처나 사면은 선악의 판단이 엇갈린다. 인간의 법칙 혹은 판단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보편성과 적합성, 필연성이 자연의 법칙과 확연히 다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명제는 없다. 명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이성계에게 일갈을 했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돼지우리에서 살려면 돼지들의 생태 환경과 습속에 익숙해져서 돼지처럼 생각해야 할까? 현실에서 벌어지는 ‘경험의 교훈’도 외면하는가? 여기가 유토피아인가? 돼지우리인가?

 최정호<대자인병원 성형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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