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 우윳빛 유리창을 끼우자
우리의 삶에 우윳빛 유리창을 끼우자
  •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 승인 2020.12.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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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윳빛 유리창은 닦고 닦아도 흐릿하다. 흐릿하면서도 뽀얗게 반만 내비치려는 목적을 담보한다. 완전한 투명성을 거부하면서 섬광으로부터 완충하며, 밖에서 또는 안에서 반만 그 너머를 보되 그 너머는 흐릿하게만 짐작하라며, 완전 정보 공개로부터 보호막을 친 셈이다. 사물을 반만 상하는 중에 신비감이 내장된다는 역설도 존재한다. 영영 어둠이 되게 하지 말고 조금씩 조명하되 조금씩 조망하면서 그러나 최후는 덮어두라는 주문을 답지한다. 맨 나중에 열리는 판도라 상자는 희망으로만 묶어두라는 신비의 빛이 우윳빛이다. 하늘이 태양으로 하여금 작렬하는 햇볕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의 슬기를 위해 우윳빛을 재창조했다고 주장해도 말이 성립되리라. 파란만장한 인간들 삶에 확 트인 명징이 오히려 곤혹함을 또는 당혹함을 금치 못하는 수가 많다. 서양 속담에 ‘날씨가 날마다 좋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날마다 좋다는 햇볕의 연속, 가려짐이 없는 뙤약볕의 영속은 생물을 괴멸케 한다.

 우윳빛은 무엇들의 큰 간극에서 서로 좁힘을 암시하기도 하고, 무엇과 무엇의 중화를 도모하기도 하고, 그 무엇들의 포융(包融)을 상정하는 중간지대가 우윳빛의 세계일 것이다. 또한 그 무엇들의 소통 매개이며 상호를 통섭(通涉)하기 위한 경계 지움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미술 용어로 ‘스푸마토’란 말이 있다. 안개(연기)와 같이 색을 미묘하게 변화시켜 색깔 사이의 윤곽과 경계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음영법이란 것이다. 예술 대상을 조금은 안개 덮인 듯 흐릿하게 처리하여 오히려 신비감을 연상해 내는 효과를 누린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시도한 화법이기도 하다. 화면 전체에 깊이와 오묘함을 더해 줄 뿐더러 원근감 공간감을 더 느끼게 해 준다는 설명이 붙는다. 동양화에서 ‘안개에 묻혀 있어야 진경산수’란 말이 있다. 오히려 동양화에서 안개 처리 비법을 통해 회화의 품격을 높인 예는 너무 많다.

 우윳빛 안에는 궁금증을 묻는다. 신비감 경건성을 함께 여민다. 사람들이 알다가 알아가다가 결국 모르는 대목은 신의 영역이라고 넘긴다. 신의 영역은 언제나 흐릿하게 남는다. 부부간에도 그렇다. 부부간의 화학적 융합을 위해 한평생 우윳빛 베일 속에 묻어두어야만 하는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도 눈에 콩깍지를 써야 제대로 사랑은 불붙기 마련이다. 제 눈에 안경은 제 나름의 우윳빛 선글라스인 셈이다.

 우리 사회생활 중에는 우윳빛을 걷어내고 작렬하는 햇빛으로 서로 보고 비판하려는 풍조가 만연한다. 도덕 율법을 따라가되 일반적 상식에 따르는 법도를 추구하면 될 터이고, 세상사에 조금씩의 흠결은 반만 눈 뜨고 보라는 주문인 것이다. 옛날 사회 구조는 이분법인데 근래는 다중 다변의 대립각으로 구조되었다고들 말한다. 네편 내편 골라가다가 보면 내편은 몇 남지 않는 자기 고립으로 진화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근래에 자주 지도자급 인테리들 사이에 형제간 다툼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던가. 영리를 셈하는 셈법도 좀 흐릿하게 두자. 만인 공평은 신도 이루지 못했다. 수학적 평등은 인간 사회의 셈법이 아니다. 다만 가능하면 최대 다수의 최대 복리면 되는 것이다.

 미술전람회에 가서 한쪽 눈 감고 남은 한쪽 눈도 절반만 실눈 뜨고 감상하면 모든 그림은 천하의 명화로 보인다는 사실을 필자는 우연히 알아차렸다. 나이가 가르쳤는가 싶다.

 소재호<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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