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40> 코인노래방에서 ‘날 그만 잊어요’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40> 코인노래방에서 ‘날 그만 잊어요’
  • 김미진 기자
  • 승인 2020.12.22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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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방에 가면 가장 먼저 누르는 번호가 있다. 낭독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자막을 따라가면 눈에 들어오는 가사가 있다.

 ‘난 이제 조금씩 그댈 잊어가나 봐요. 가끔 웃기도 하는 걸 보니. 조금 더 지나면 그댈 만나게 돼도 반가울 것 같아요.’
 
 그땐 가사가 알려주는 신호를 잘 알지 못했다. 조금씩 잊어간다는 게 뭔지. 어디서 생겨나오는 반가움인지. 그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되는 마음. 얇고 작은 만두피가 넓적한 귀가 되고 배를 띄우는 양탄자가 되고 날아가 모래알이 되는 마음. 더 얇고 넓게 펴내고 다져서 땅이 되는 마음. 잊어간다는 말은 슬펐다. 

 가수 거미의 ‘날 그만 잊어요’. 이 노래가 퍼지던 2004년 9월, 나는 대체로 건강했고 대체로 어리둥절했다. 포항에서 대구로 이사 온 지 막 1년이 됐고, 알지 못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가을을 맞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저 대도시의 평범한 동네를 관찰하고, 이곳과 그곳 친구들의 정서를 구분하며, 두 도시의 묘하게 다른 말씨를 분별하면서 기계처럼 학교와 학원과 집을 오갔다.

 태어난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크기에 놀라워하면서도 무미건조한 사람들의 못된 말을 알아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음이 종종 쭈그러들었다. 먼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먼저 발랄해졌다. 그게 나쁘진 않았다. 나는 남을 웃기기 좋아하니까. 처음 보는 사이를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는 마음 거품이 있으니까. 한편으론 이곳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는 묘한 쾌감이 들어 좋았다. 거기든 여기든 그곳이 있으니까.

 뽈뽈뽈 걸어 코인노래방에 도착했다. 학교 앞 퀴퀴한 오락실 안이 아닌, 집에서 걸어 1분 거리에 쾌적한 전용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그때부터 용돈의 대부분을 그곳 동전교환기에 착실히 집어넣었다. 쭈글쭈글한 지폐가 빛나는 동전으로 바뀌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속이 탈탈 털리는 것 같아 시원했다. 

 왼손 가득 동전을 꼭 쥐고 작은 문을 열어젖히면, 소리를 지르고 웃긴 말을 해도 혼나지 않는 드넓은 단칸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악한 플라스틱 의자에 친구와 마주 앉아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을 대충 내려놓은 뒤에, 화면 밑에 달린 숫자 버튼을 꾹꾹 누르며 서로를 바라보면 비로소 도시는 똑같은 공간일 뿐이라는 해방감을 느꼈다. 두꺼운 노래 책자 재질이나 육중한 기계에서 내뿜는 모니터 냄새, 좁은 코인노래방의 모습은 어디든 비슷할 테니까.

 
 ‘Uh~ 날 그만 잊어요. 난 왜 이제 까맣게 잊은 채 행복하게 잘 지낼 그대가 걱정되죠. 아직도.’

 잘 따라 하지 못하고 매번 높은 음이 어긋나도, 허리를 지긋이 세우고 감정을 살려 꿋꿋이 불렀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잊어보려 마이크를 꼭 붙잡았다. 첫 음에 무거운 힘을 주지 않고 이야기하듯 부르는 방법도 조금씩 흉내 낼 수 있었다. 부르면 부를수록 거미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미는 내게 살아있는 작은 신이었고 불안한 마음을 안아주는 노래 기계였다.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MP3에 담아둔 거미 노래를 차례로 들으며 걸었다. 듣던 노래가 듣는 노래가 된 밤길을 걸었다. 다시 듣기 좋은 2집에는 ‘날 그만 잊어요’뿐 아니라 ‘인연’이라는 곡도 아름답다. 타이틀곡이 아닌 숨은 노래를 찾아내 불러보는 기쁨. 이 노래에 붙어있는 어리둥절한 시절을 꺼내 먹는 슬픔. 아니 리듬!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나는 더 이상 코인노래방에 가지 않게 되었다. 노래방도 잘 찾지 않게 되었다. 부르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좋아진 것 같다. 예전과 달라진 방식으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떠나옴으로 변함없이 좋아하고 있다. 최근 중고장터에서 산 오래된 MP3로 다시 들어봐도 여전히 좋은 거미의 노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다. 지금도 갈고 빛내며 현장에서 근사하게 살아있다. 덕분에 주저 없이 직행하는 나의 68531. 잊지 않는 번호가 있어 가끔 웃을 수 있다.
 

 글 = 임주아 시인

   

 ◆임주아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전주 선미촌에서 창작자 동료들과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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