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1> 차로서 막힘을 풀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1> 차로서 막힘을 풀다.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0.12.2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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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작, 간송미술관 소장

  올 한해도 저물고 있다. 코로나19라는 큰 장벽에 막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면 2021년은 이 장벽을 뚫고 우리가 이겨내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사소한 것부터 막힘의 원인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보면 어떨까.

  일찍이 순자(荀子, BC323?~BC248?)는 “무릇 사람은 어느 한 부분에 가려져 막힘으로서 큰 도리를 어둡게 한다. 이 둘은 항상 대립하여 모두를 의심하게 되며 미혹에 빠지게 된다. 세상은 두 가지 도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하여 폐(蔽)에 대해 제시하였다.

 

  인간에게는 좋아하는 욕구만 있고 절제가 없다면 막힘이 일어날 것이고,

  미움만 있고 바른 점을 보지 못한다면 막힘이 생긴다고 했다.

  처음만 있고 끝이 없으면 막히게 되고, 결과에만 치중한다면 막힘이 있다.

  먼 곳만을 바라보면 막힘이 있고, 가까운 것만을 중시한다면 막히게 된다.

  너무 넓게만 알려고 하는 얕은 지식으로 아는체하는 것은 막힘을 부른다.

  옛 것에만 치중하면 막히고 오늘의 현실만 중시하는 것, 모두 막힘을 부른다고 했다.

 

  순자가 제시한 열가지 폐이다. 즉 한쪽만을 강조하면 막힘이 생기며 이들은 상대를 만나면 서로 안 막히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막힘을 풀기 위해 많은 이론을 제기한다. 인간사에서 막힘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막힘은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순자가 제시한 열가지의 막힘,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에서도 늘 존재하는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해법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차를 마시며 조용히 마음을 살핀다면 일상 속에서 자신을 찾는 길이 될 것이다. 차를 마시는 것이 단순히 음료의 개념을 넘어 타인과의 소통은 물론 자신과의 소통이 될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서찰을 통해 차를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낸 인물이다. 매번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서찰을 보낸다. 그중에 자신의 불경에 대한 안목을 검증하고 싶다는 서찰을 보내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차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햇차를 몇 편이나 만들었습니까. 잘 보관했다가 나에게도 보내주시구려. 자흔과 향흔 스님이 만든 차도 빠른 인편에 보내주시오. 혹시 한 분을 정해 보내신다고 해도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차를 받고 눈이 번쩍 떠졌다는 추사, 초의를 은근히 놀리며 추사의 마음을 드러낸 내용이 있다. 추사에게 차는 이러한 즐거움까지도 선물한 듯하다.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에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만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는 원래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대(초의)의 치통은 실로 마음이 쓰입니다만, 혼자 좋은 차를 마시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감실의 부처님께서 또 영험한 법률을 베푼 것입니다. 나는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었는데, 지금 다시 차를 보아 나아졌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인편이 서서 재촉하여 어두운 눈으로 간신히 적습니다.”

 

  사실 천재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을까. 그의 제주도 유배 생활은 9년이라는 긴 세월이었다. 풍토병에 시달리는 괴로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1849년 유배지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를 위로했던 것은 그를 찾아오는 벗과 차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였을 것이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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