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겨울, 김장 김치의 추억
눈 내리는 겨울, 김장 김치의 추억
  • 정영신 전북소설가협회 회장
  • 승인 2020.12.14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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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다. 12월이다. 어린 시절 이맘때면 이집저집 담장 옆 우물가에 소금에 절여진 배추들이 산처럼 쌓여 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품앗이로 순서를 정해 오늘은 순이네 내일은 영희네…… 서로 돌아가며 한 집에 모여 김장을 했다. 먼저 찹쌀에 들깻가루를 섞어 죽을 끓인다. 이웃집 어머니들은 찹쌀죽이 식는 동안 두 팔을 걷어 올리고는 100포기도 넘는, 하룻밤 소금물에 적당하게 절여진 배추를 서너 번씩 우물물에 헹구어 널따란 대나무 채반에 걸쳐 놓는다. 소금물을 빼내는 것이다. 다음에는 당근, 무, 파, 양파, 대파, 마늘, 생강, 청양고추, 새우젓, 황석어젓을 달인 젓국물, 생굴 등을 뻘건 고춧가루와 찹쌀죽을 넣고 버무려 김칫소를 만들어 놓는다.

  김장 날, 하늘에서는 종일 하아얀 함박눈이 쏟아지고 어머니들은 마루에 둘러앉아 네 쪽으로 나누어진 400여 쪽의 배춧잎 사이사이에 야채 등이 섞인 고춧가루 양념 소를 먼저 끼워 넣고 미리 찹쌀죽을 넣어 불려 놓은 고춧가루 양념을 골고루 바른다. 그리고는 퍼런 배추 겉잎으로 한 바퀴 감싸서 차곡차곡 땅에 묻어 놓은 장독에 담고는 그 장독을 볏잎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한나절을 훌쩍 넘기는 김장 행사가 끝나고 나면, 커다란 냄비에 동태와 무, 미더덕, 굴, 두부, 미나리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동탯국을 얼큰하게 끓인다. 이른 새벽부터 정오가 넘도록 이어진 김장 행사를 치르느라 허리도 팔다리도 심하게 아프지만, 갓 담근 김장 김치에 통깨와 참기름을 듬뿍 뿌려 동네 어머니들과 함께 먹는 김장 날의 늦은 점심은, 최고로 맛있는 초겨울의 특별식이었다.

  겨울 김장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전라도식 김장은 그 김치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물론 김장의 주가 되는 재료는 배추지만 전라도는 이 배추김치 외에도 파김치, 고들빼기와 파김치, 파와 갓김치, 총각무김치, 깍두기김치, 동치미 등을 함께 더 담근다. 북쪽은 산간지역의 특성상 고추 농사가 원활하지 못해 백김치를 담그지만, 우리 남부지방은 그중에서도 전라도는 태양에 잘 말린 질 좋은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시각적으로도 식감이 최고인 버얼건 김치를 담근다. 또 삼한사온이라는 대기의 특성상 따뜻한 남쪽은 2년 3년씩 김장김치를 묵혀 두고 오래도록 먹기 위해 소금간으로도 짭짤한데 거기에다가 새우나 황석어 젓갈, 멸치 젓갈 등을 그대로 넣거나 끓여서 진한 젓국 형태로 고춧가루 양념에 섞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인 배추 겉잎을 펴서 맨 위에 덮고는 그 위에 다시 또 굵은 소금을 하얗게 뿌려 놓는다. 그래야 3월쯤에 높은 산의 잔설이 녹아내리고 꽁꽁 언 강물이 봄 햇살에 풀어져도 김장 김치가 쉽게 시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초겨울의 김장 문화는 우리 전라도 어머니들의 훈훈한 미풍양속이다. 또한 맛깔 나는 저장 음식문화이며 음식놀이문화이다. 오늘은 순희네 집에 모여서 김장을 담그고 다음 날은 영희네 집에 모여서 김장을 담그며 우리 어머니들은 흥얼흥얼 노래도 부르고 서로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의 애환들을 공유하고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힘든 시집살이나 남편살이로 인한 아찔한 결정의 순간들을 넘기곤 하셨다. 또 김장문화는 김장축제이다. 김장은 긴 겨울 3개월간의 필수적인 저장 음식이기 때문에 모두 100포기 200포기 넉넉하게 담근다. 그래서 그날 김장을 함께한 동네 어머니들 손에 골고루 한통씩 들려서 보내주고, 동네의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이웃집에도 서로 한 통씩 나누어주며, 북풍한설 볼 시린 겨울날에 난로보다도 더 따스한 이웃 간의 정을 나눈다.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긴 겨울, 불기운이 들어가지 않는 윗방에는 옥수숫대를 이어 만든 울 안 가득 고구마가 쌓여 있고, 솔가지로 넉넉히 불을 땐 아랫방 화롯불 위에는 고구마와 알밤이 구워지고, 김장 김치 한 가닥을 그 군고구마나 찐고구마 위에 얹어 호호 불어먹으면 그 달콤한 맛은 환상이었다. 또 한밤중 친구들과 모여 놀다가 특별한 먹거리가 없던 그 시절 차게 식은 밥 한 숟가락에 김장김치 한 가닥을 얹어 먹으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그 음식 궁합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또 그 김장김치를 잘게 썰어 밀가루를 뿌려 김치전을 해 먹으면 김치라서 느끼하지 않은 최고의 반찬이며 간식이었다.

  김장철이 되면 갑자기 친구들의 식성이 좋아진다. 달랑 김장 김치 몇 가닥에 흰밥을 싸 왔을 뿐인데 모두 말이 없이 도시락 먹기에 열중한다. 그 시절 교실 안에는 마치 김장김치 전시장인양 친구들 도시락마다 배추김치, 갓김치,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총각무김치, 깍두기김치, 얼갈이김치 생채김치 등 다양한 김치들이 빼곡하게 담겨져 있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무를 채로 썰어 싱싱한 생굴과 함께 버무린 전라도식 생채 김치를 작은 통조림 병에 담아 도시락 반찬으로 가져갔었다. 지금도 군침이 도는 최고의 겨울 도시락 반찬이었다. 생채 사이를 이리저리 돌고 돌며 감칠맛 나는 생굴을 찾아 먹는 재미는 정말 짜릿했었다.

  12월이다. 많이 춥다. 코로나19 확진자수가 이제 천 명이 넘는다. 춥다. 몸도 마음도 이 사회도 국가도 모두 너무 춥다.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수칙도 3단계로 격상시켜야 할지를 논의 중인 이 중대한 시점에서 도란도란 이웃이 모여 김장을 하던 그 시절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동탯국을 함께 먹던 그 김장 날이, 너무도 그리워진다. 어서 빨리 백신보급이 대중화되어 이 코로나19와의 전쟁이 멈추어지고 이웃이 함께 모여 김장김치를 담그고 함께 모여 늦은 점심을 먹던 그날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정영신 <전북소설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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