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8> 김창완 1집과 떠난 새로운 여행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8> 김창완 1집과 떠난 새로운 여행
  • 황보윤 소설가
  • 승인 2020.12.08 1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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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즐겨듣는 노래는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지문과도 같다. 삶의 나이테마다 그가 사랑한 노래들이 고유한 형태로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열어볼 수 없고 누구도 재생시킬 수 없는 음악감상실이 머릿속에 존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소뇌는 매우 분주해진다. 청각과 시각, 감정조절 기관까지 총동원하여 귀에 닿는 소리와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피부에 닿는 감각과 그날의 기분까지 주크박스에 담는다. 그래서인지 음악에 대한 기억은 치매의 손길이 가장 늦게 닿는 영역이라고 한다.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 라는 영화가 있다. 치매 노인들을 음악으로 치료하는 과정이 담긴 다큐 영화다. 사회복지사 댄 코헨은 그들이 좋아했던 음악을 아이팟에 담아 헤드셋으로 들려준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반쯤 감겼던 눈이 커다래지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문이 터진다. 비록 과거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음악은 오롯이 남아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내 삶의 첫 번째 음악이 헤드셋에서 흘러나온다. 첫 소절을 듣자 눈 내리는 풍경과 밥 짓는 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만져진다. 금성 미니카세트에서 오토리버스로 끝없이 재생되는 노래는 <김창완 1집 새로운 여행>이다.

 

 꼬마야 꽃신 신고 강가에나 나가보렴/ 잠깐만 돌아봐도 생각나는 눈자위엔/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마주 보아도 슬프지 않네/ 그대 돌아서 가던 그 길 발자욱마다 꽃이 펴도/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파도가 노래하네 새들은 춤을 추네 품팜 처얼썩….

 

 산울림으로 활동하던 김창완이 1988년 솔로로 발표한 첫 앨범이다. 같은 해 가을, 나는 강원도 인제군으로 발령이 났다. 인제는 군부대가 많은 지역이었다. 또, 북으로 흐르는 내린천이 있었다. 내린천은 홍천군 내면에서 인제 기린면을 지나는 소양강의 지류였다. 도서출판 남풍에서 나온 책을 읽으며 통일 조국을 꿈꾸던 스물넷 초임 교사는 내린천이 흐르는 인제가 좋았다. 내가 근무할 방동초등학교는 기린면에서 삼십여 분 더 들어간 방태산 자락에 있었다. 내린천은 보이지 않았고, 학교 옆에 군부대가 있었다. 나는 입대한 심정으로 짐을 풀었다. 실망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낯설고 신비로운 동막골이었다.

 

 남자 교사들은 저녁을 먹기 바쁘게 교장 관사에 모여 마작을 했다. 캄캄한 밤 관사의 노란 창으로 걸걸하고 억센 만주 사투리가 새어 나왔다. 밤마다 그곳은 만주벌판을 달리던 마적 떼가 말을 묶어놓고 머무는 숙영지로 변했다. 눈이 내리는 날, 학교 아저씨는 슬레이트 함석에 멧돼지 고기를 구웠다. 함석지붕의 골을 따라 기름이 흘러내렸다. 연기를 피우며 익어가는 붉은 살점 위에 흰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동약수터가 있었다. 같은 관사에 살던 선배 교사가 약수터에서 떠온 물로 밥을 지었다. 철분이 많아 붉은빛이던 약수는 푸른 밥이 되었다. 찬 손으로 밥공기를 감싸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방동의 겨울밤은 길었다. 유리창에 살얼음이 끼는 밤이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였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자장가처럼 김창완의 노래가 나직나직 들려왔다.

 

 예쁜 성이 있어서 거기에 왕자가 살고/ 또 다른 성에는 예쁜 공주가 살고 있으면 좋겠다/ 나는 거기 백성이고 날마다 날마다/ 공주를 보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어느 날 공주가 왕자와 함께 사랑에 빠져 숲속으로 달아났으면 좋겠다….

 

 시대와 무관하게 평화로운 노래였다. 그런 나라의 백성이 되는 ‘꿈’을 꾸다 까무룩 잠이 들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나는 방동에서 두 계절을 보냈다. 이듬해 2월, 충남 서천으로 전보 발령이 났다. 전교조 창립을 위해 주말마다 원주에서 회합하던 ‘강원교사협의회’ 교사들과 작별하고 짐을 꾸렸다. 빨갱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구독하던 한겨레 신문과 교감 선생이 가져갔다 돌려준 ‘러시아 혁명사’를 가방에 넣었다. 첫 번째 트랙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글 = 황보윤 소설가

  

 ◆황보윤

 200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단편집 <로키의 거짓말>, <모니카, 모니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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