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북문학기행> 18. 건지산 사이로 은빛 물살 일렁이는 오송제·안태운 시인 ‘산책하는 사람에게’
<2020 전북문학기행> 18. 건지산 사이로 은빛 물살 일렁이는 오송제·안태운 시인 ‘산책하는 사람에게’
  • 이휘빈 기자
  • 승인 2020.12.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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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나는 내가 자라났던 공간을 배회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저수지와 숲과 동물원을 지나야 했다(시 영상 밖에서)”

 안태운 시인의 시에서 어디론가 걷는 일은 ‘구도’라기 보다 그가 가진 상상들을 겹치는 데서 시작한다. 안 시인은 전주에서 살았고, 지금도 전주에 오고 있다. 인터뷰에서 그가 살았던 호성동과 거닐었던 송천동은 이제 아파트로 가득 차 있다. 새로워진 길과 건물들 사이로 원래 살던 주민들의 모습은 이제 정형화됐다. 부동산과 임대를 내놓은 빈 가게들, 깨진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인 작은 주택들을 가리는 거대한 아파트들. 비단 오래전 일이 아니라 이미 지금도 유효한 풍경이다.

 그러나 안 시인의 이야기를 따라 오송제를 걷다 보면 그가 묘사한 유년 시절이 그대로 떠오른다. 전주시 대지마을과 건지산의 작은 길을 털레털레 걷다 보면 오송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나온다. 오송제는 5분만 돌아보아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저수지다. 산과 연못 사이로 낙엽도 없는 이 길을 멍하니 보고 있다보면, 어린 아이들 손을 이끌고 걷는 어머니, 강아지와 산책 나온 아저씨, 팔짱긴 노부부가 보여주는, 늦은 오후에 들려준 작은 신화 같기도 하다. 등산복을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연못을 따라 홀로 걷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코로나19로 건지산과 모악산에 사람이 많아 이 곳에서 운동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안 시인은 이제 수도권에 살고 있지만 전주에 오면 시간 날때마다 호성동을 찾는다고 했다. 시인의 두번째 시집에서는 호성동과 전주시 일대를 거닐던 모습들이 선명하다. 시인은 이에 대해 앞서 인용한 시 ‘영상 밖에서’를 창작할 때에도, 또 이번 시집을 내면서도 전주시를 계속 걸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호성동에 대해서라면 여러 모로 할 말이 많고 그 시절이 간간이 떠오르기도 그립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과는 풍경이 많이 다르지만, 제가 살았던 동신아파트에서 북초등학교로 걸어가는 길에는 가을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졌는데, 그 길이 생각난다. 그 양옆으로는 도랑이 있고 또 논이 있고 물뱀도 간혹 움직이며 다녔다”라며 “초등학교 저학년 서예 시간에 꽤 귀했다고 추정하는 벼루를 가져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무거워서 그냥 길에 버리고 왔던 기억이 남는다”며 웃었다.

 안 시인에게 고향의 과거는 시를 쓰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안 시인은 줄곧 걸어다니면서 시로 쓸 수 있는 언어와 리듬을 찾아내고, 거기서 풍경을 섞었다. 이는 상상이 아니라 발품을 오래 팔아야 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의 시의 끝은 말라가는 진흙 위에 얹힌 발자국처럼 선명하다. 하얀 갈대마다 번진 저녁놀 아래서, 시인의 발자국이 언어화된 그 작은 길들을 오래 새겼다.

이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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