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0>간서치 이덕무의 명음(茗飮)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90>간서치 이덕무의 명음(茗飮)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0.12.0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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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 12폭, 〈우후산장도〉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부분확대

 18세기 중후반 조선의 학자들은 사소한 대상에 대한 편집광적인 애호벽으로 많은 저작들을 남긴다. 특히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스스로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癡)라고 부를 정도로 다독가였다. 알려진 호(號)만 해도 무려 12개가 넘는다.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매탕이 있으며 ‘벌레와 물고기에 대해 주석을 다는 집’이라는 주충어재(注蟲魚齋)라는 호와 관련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렇듯 작고 변변치 않은 물상에 관한 관찰력을 글로 드러냈다. 벌과 어항속 붕어를 묘사한 글을 보면 섬세함은 물론 생명력을 느낄수 있다.

 

  작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놀면, 드넓은 세계가 열리니.

  해진 발 사이로 스민 햇살, 눈이 부시구나.

  사각 사각 창문의 종이 뚫으려는 벌, 억센 힘은 다리에서 나오고.

  어항 속 붕어, 번쩍임은 아가미에 있구나.

 

  세상의 이치가 모두 작은 것에서 출발하니 크고 넓은 것만을 보고자 한다면 분명 구멍이 숭숭 뚫려 허가 많을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창문에서 종이를 뚫고자 하는 어리석음 보다는 긁는 소리와 광경을 보고 억센 힘에 비유한 것으로 보아 긍정적 사고가 강했던 것 같다. 또한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도 깊었던 것 같다.

  이덕무는 서얼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며 이사를 많이 다니는 등 남의집살이를 많이 했다. 서울 중부 대사동(大寺洞) 본가에서 태어나 20세가 될 때까지 7번이나 이사를 했다. 26세에 다시 대사동으로 이사를 온 뒤에 43세에 이사를 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으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백탑시파 동인이자 연암학파의 일원인 서얼 출신의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1779년 초대 규장각, 외각 검서관이 되는 등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게 된다. 1792년 정조의 문체반정(당시 자유로운 문체에 대한 정조의 규제정책)으로 이덕무는 연암학파의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정조의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와병 중인 이덕무는 정조에게 고할 반성문 걱정에 사망했다고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쇠약한 상황이었다.

 

  이덕무의 차에 대한 시는 몇 편 되지 않지만, 벗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경무를 감상하는 시가 있다. “관재에서 차를 마시며 윤증약·유혜보와 함께 읊다”라는 시이다.

 

  가을 윤달이 하마 그믐이라니,

  세월은 흘러 멈추지 않네.

  석류 열매는 옹이 진 나무에 곱고,

  개구리들은 뒤뜰에서 시끄럽구나.

  복은 아껴서 아이에게 주고,

  정신수양을 위해 보고 듣는 것 줄여야지.

  사복시의 우물물로 차를 달이니,

  가치로는 남령에 버금가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흐르는 세월의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복을 아껴 아이들에게 전하고, 정신건강을 위해 보고 듣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싶지않은 심정인 듯하다. 이 와중에 차 끓이는 물로 가장 좋은 중국의 남령수에 버금가는 사복시의 맑은 물로 차를 달여 마시니 세상살이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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