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5) 노오란 은행잎은 ‘가을’ ‘가을’ 하고 밟힌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5) 노오란 은행잎은 ‘가을’ ‘가을’ 하고 밟힌다
  • 김소윤 소설가
  • 승인 2020.11.17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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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이다. 가을이라고 소리 내어 발음할 때, 그 두 음절 속에는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온갖 그리운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교정의 낡은 벤치, 가을비 지나간 흙 내음 가득한 마당, 친구들과 부지런히 주고받던 손 편지, 이름 모를 시골길의 자욱한 저녁 안개, 한때는 아꼈으나 이제는 서로 무심해져 버린 숱한 인연들……. 그리움은 아픔이 아니라 설렘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그래서 가을이 가져오는 그리움을 쓸쓸함보다는 행복으로 누린다. 특히나 이렇게 노오란 은행잎들 우수수 쏟아져 온 거리를 환하게 밝힐 때에는.

  어딜 가나 ‘가을’ ‘가을’하고 은행잎 밟히는 거리를 걸으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윤도현 밴드의 노래를 밤낮으로 듣던 어린 날의 내가, 아직도 가을을 그 노래로 기억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쓴 편지를 품에 안고 가을 길을 걸을 때, 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가서 친구에게 닿곤 했다. 편지 내용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참 부지런히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친구는 어김없이 그 마음을 먼저 읽어주곤 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가을마다 찾아오는 그 향수는, 아마도 ‘세상의 모든 것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유일하게 변치 않는 진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 없이 주고받았던 그 마음들도 이제는 찰나에 머물던 그리움이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가을이 슬퍼지는 건 그 그리움 때문이 아니다. 그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또한 그러하리라는 확실한 예감 탓이다.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항상 궁금했다. 스치는 바람에도 하염없이 흔들리는 내 작은 마음이 언젠가는 저 들녘의 나무나 바위처럼 단단해질 수 있는 것인지. 정처 없이 떠도는 이방인이 아니라, 어딘가 뿌리를 깊이 박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설 수 있는 것인지. 항상 그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그 가을 길을 걷노라니 스스로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흔들림 또한 아름다웠음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오랫동안 친구를 보지 못했다. 어떤 인연은 그 시기에 꼭 맞춘 운명처럼 다가와 삶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다가도, 마치 역할을 다한 것처럼 급작스럽게 빠져나가 그 서먹함에 어리둥절해진다. 한때 그 멀어짐을 견디지 못했다. 멀어진 거리만큼 그 사람도 잃은 것 마냥 초조했었다.

  이제는 생각한다.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겨울 눈보라에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그건 누군가 앗아갈 수도, 시간이 훔쳐갈 수도 없다. 각자가 자기 안에 내밀하게 간직한 것이며 다소 퇴색될 순 있을지언정 영영 잃어버리진 않는 것이다.

  가을날 바람에 휘날려 흩어져버리는 낙엽처럼, 때론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변하리라. 그래도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파릇파릇 연두빛으로 다시금 돋아나 그 고유한 가치를 입증한다고 믿는다.

  내게 ‘소설’이란 두 글자가 그렇고, 지금은 멀어져버린 소중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그렇다. 다시 만날 수 없어도, 다시 가까워지지 못한다 해도, 가을날의 그 노오란 은행잎처럼 빛나던 마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렇게 믿고 있다.

 

 글 = 김소윤 소설가

 

 ◆김소윤

 2010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2년 자음과모음 장편소설상, 2018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장편<코카브-곧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단편집<밤의나라>, 장편<난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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