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9> 차, 이질을 다스리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9> 차, 이질을 다스리다.
  • 김미진 기자
  • 승인 2020.11.15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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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한가한 삶이란 몇 말의 차를 만들고/

    찌그러진 질화로 가져와 숯불 피우고/

  다관은 오른쪽에 찻잔은 왼쪽에 두고/

   오직 차만을 달이니 무엇이 나를 유혹하리.
 

  범해(梵海, 1820~1896)의 「다구명(茶具銘)」이라는 시이다. 몇 말의 넉넉한 차, 오랫동안 사용하여 찌그러진 질화로, 차를 마시기 위해 불을 피우며 차 맛을 기대하는 이 기분을 누가 알까. 따르기 편하게 다관과 찻잔의 위치까지 정하여 준비하니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알리가 없을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차의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에게 맑은 삶이란 차 달이는 즐거움이며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음을 말한듯하다.

  범해 각안(覺岸)은 대흥사의 승려로 초의선사의 다풍을 이었으며 그가 지은 차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다약설(茶藥說)」과 「다가(茶歌)」, 「초의차(草衣茶)」 등 그 외에도 차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들이 있다. 속명은 최어언(崔魚堰)으로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흰 물고기를 본 후 그를 임신하였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는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에서 태어났다. 가난하여 학문보다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행상을 하다가 14세에 대흥사 한산전으로 출가하여 호의(縞衣)의 제자가 되었다. 초기에는 배움이 적어 경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학문을 포기하고자 하였지만 꾸준히 정진하여 한 번 보고 들으면 뜻을 이해할 정도로 빛을 발휘하였다. 한번은 아랫마을에 사는 선비에게 『통감』을 빌려보기 위해 며칠간 간청하였는데, 그 선비는 드디어 하인을 시켜 대흥사까지 책을 가져다주게 했다. 뒤따라가던 범해는 책을 한 권씩 읽고 무심결에 길에 던졌다. 대흥사에 도달하자 더 읽을 책이 없어 하인은 다시 그길로 『통감』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승려이지만 역사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이러한 지적 욕구는 여러 편의 사기(私記)를 저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범해는 초의의 다풍을 이어 한국의 차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33세 젊은 나이에 이질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다음은 차의 약효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는 한 달이 지나도록 사지가 늘어지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을 알게 된 무위(無爲)와 부인(富仁)이 말하길 “내가 차로 어머니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며 소지하고 있던 차를 달여 마시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마침 범해에게 차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그들의 권유대로 차를 달여 마신 후 범해는 이질을 치유할 수 있었으며 「다약설」에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다.

 

  첫 사발을 마시니 뱃속이 조금 편안해지고,

  둘째 사발을 마시니 정신이 상쾌해졌다.

  서너 사발을 마시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뼛속까지 불어 애초에 병이 없었던 듯 거뜬하다.

 

  그는 이때부터 점점 먹고 마실 수가 있어 몸의 움직임이 날로 좋아졌다는 내용이다. 백 가지 약이 좋기는 하지만 알지 못하면 쓸 수 없음을 상기시키며 차의 효능을 강조하였다. 심한 이질을 앓은 후 차를 마시고 회복한 경험을 기록하였다. 치료할 방법이 있는데 치료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쓴 듯하다. 그는 「다가」에서도 차를 예찬한다. 그중 차를 마시면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고, 정신의 청명함이 한나절은 가고, 소화가 잘되니 가슴이 뻥 뚫리고, 졸음을 물리쳐 눈이 번쩍 뜨인다. 설사에 좋은 건 이미 경험했고 감기에도 신통한 효험이 있다고 하는 등 범해는 차의 효능을 직접적인 실생활에 적용하여 사람들이 이용하길 바랐던 것 같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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