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4> 꽃 피는 봄이 오면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4> 꽃 피는 봄이 오면
  • 임미성 시인
  • 승인 2020.11.10 14: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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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논에 물이 잘람잘람하고, 송홧가루가 홧홧 날리는 날이었다.

 

 아빠는 마을 어른들과 모종에서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동네 어귀에 있는 모정(茅亭)을 우리는 ‘모종’이라고 불렀다. 마을 어른들이 일하다가 쉬기도 하고, 우리가 공기놀이, 고무줄놀이하던 곳이다.

 

 학교가 끝난 후 나는 내 친구 점순이와 함께 집에 가는 중이었다. 구구단을 외우던, 받아쓰기로 교가를 외워 쓰던,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아빠가 나를 부르셨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빨간 원피스를 입은 나는 아빠가 부르는 대로 모종으로 올라갔다. 동네 아저씨들이 보름달 빵에 막걸리는 드시는 동안 아빠는 계속해서 딸 자랑을 하셨다.

 

 그랬다. 나는 우리 아빠한테만 이-쁜 딸이었다. 언니 둘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인이고, 손위 오빠는 장손으로서 귀함과 귀염을 모두 받던 터였다. 더구나 손아래로 남동생까지 태어났으니, 나는 그냥 계집아이였다. 얼굴도 까맣고, 볼이 빨간 나에게 아빠는“우리 딸이 귄있어.”라고 말씀하시며 기를 살려주셨다. 귄있다, 우리 지역사람들만 아는 말. 예쁘지는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면도 있다는 뜻이란다.

 

 내가 온통 빨간 나무처럼 서 있을 때, 아빠는 노래를 시키셨다. 어찌 된 일인지 내 머릿속에 여러 노래가 지나갔다. 할머니가 부르던“아- 으악새 슬피 우는”,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와 엄마가 자주 부르던 “낙양성 십리 허에”도 떠올랐다. 동생에게 시켰으면 곧바로 불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연예인 끼로 똘똘 뭉친 내 동생 임인환. 판소리, 연극, 능청스레 사회까지 잘 보는, 온갖 재능을 타고난 녀석. 가끔 질투도 난다.

 

 결국 “꽃 피는 봄이 오면”으로 시작하는 ‘제비처럼’을 불렀다. 우리 집에 있는 네 개의 다리와 접이식 문이 달린 금성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 노래.

 

 “꽃 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언덕에 올라보면 지저귀는 즐거운 노랫소리, 꽃이 피는 봄을 알리네.”

 

 덧니가 예뻤던 가수 윤승희. 처음엔 노래만 부르다가 어느 순간 그 가수가 노래 중간중간 하던 몸짓도 따라 하고, 빨간 원피스 자락을 빙빙 돌리면서 불렀다. 어쩐지 그 노래는 신나게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신은 소식이 없고, 오늘도 언덕에 혼자 서있네.

 푸르른 하늘 보면 당신이 생각나서 한 마리 제비처럼 마음만 날아가네.”

 

 “날아가네” 부분을〔날라가네〕로 발음하는 그 가수의 버릇도 그대로 살려서. 노래를 마치자 박수 소리와 함께 어떤 아저씨는 100원짜리 동전을 주셨고, 어떤 분은 빵을 주시기도 했다. 쑥스러우면서도 뭉클하면서도 살짝 신이 나기도 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지금도 내가 아끼는 빨간 원피스를 입을 때면 그 노래가 생각난다. 그때 아빠는 나를 응원하고, 나도 아빠를 응원하느라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지만 가끔은 그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꽃 피는 봄에는 마스크 없이 노래하고 떠들썩하게 즐거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를 모시고 금마면 신용리, 그 모종에 가봐야겠다. 아빠가 쓴 모정 상량의 붓글씨가 나를 반겨주는 곳. 훌쩍 가버리고 다시 오지 않는 아빠를 떠올리며, 빨간 원피스를 입고 노래 부르던 아홉 살짜리 어린 나를 다시 소환하며.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임이여.”

 

 글 = 임미성 시인

 

 ◆임미성

 2018년 동시집「달려라, 택배 트럭!」을 냈으며, 2018 전주의 책, 익산시립도서관 1주 1책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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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환 2020-11-10 21:05:10
그 옛날 그 시절 참 재미 있었던 모정 그 모정은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가끔 가보면 그시절 그렇게도 크던 모정이 지금은 너무도 작아 보인다 그때 그시절이 생각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