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竹 기념비 세워 학덕 기려야
孝竹 기념비 세워 학덕 기려야
  • 고재흠 수필가
  • 승인 2020.11.0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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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은 고래로부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온 고장이다. 산과 들, 바다를 모두 갖춘 천혜의 관광지로 경쟁력이 높다. 특히 변산반도 노을은 세계적인 명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부안이 갖은 자산은 비단 자연이라는 자원뿐만이 아니다. 생거부안의 명성답게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든다.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도 부안의 자랑이다. 조선후기 보안면 우반동에서 이상세계를 모색한 실학의 태두인 반계 유형원 선생이 그 대표적인 예지만, 이미 고려 후기부터 부안 김씨인 지포 김구 선생이 유학의 씨를 뿌렸다고 볼 수 있다.

내 고향은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노적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치 큰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듯, 마음이 넉넉하고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주산(主山)인 노적봉은 수호신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있어 마치 어머니 치마폭처럼 따뜻하고 의연하며, 위엄스럽게 보이기도 하다.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노적 마을 좌측에는 거석천(擧石川), 우측에는 청림천(靑林川) 등, 두 냇물이 모이는 양수 합이라, 큰 인물과 귀인이 난다고 했다. 명산은 인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이 마을에서 조선 시대 때 11명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대과에 문과 2명, 무과 2명, 소과에 진사 7명 등이다. 성균관에서는 전북 부안군 상서면 노적마을이 과거급제자가 전국 최다 배출 된 으뜸 마을이라는 인정서(認定書)를 성균관장 명의로 발급하기도 했다.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孝竹)거리가 있다. 예로부터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파란 물감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과거급제자들의 영광을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효죽을 세웠던 그 길거리를 ‘효죽거리’라 부른다. 본인과 가문의 영광은 물론, 부안군과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그 효죽 대나무는 크고, 곧고, 높이 잘 자라 효죽대로 뽑혔으니 그 대나무 역시 큰 영광을 얻은 셈이다. 조선 시대부터 보전된 효죽거리의 효죽은 간데없고 지금은 옛 선현의 발자취만 남아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위 선인들의 높은 학덕을 오래도록 기리고 후세에 본보기가 되도록 하고자, 그 옛날 효죽을 세웠던 자리에 효죽기념비와 상징물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자 하는 마음 간절하다.

요즘 도시학교 주변이나 학원이 밀집된 곳에서는 등용문이라는 간판이나 현수막을 흔히 볼 수 있다. 등용문은 잉어가 급류를 타고 중국의 황허강 상류에 올라가서 용이 된다는 전설과, 입신출세에 연결되는 어려운 관문이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에 비유한다고 했다. 바로 고시에 응시하여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합격을 기원하는 뜻이리라. 옛날 과거 시험이나 요즘 고등고시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시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명의 과거 급제자도 없는 마을이 수없이 많을 텐데 한 마을에서 11명이나 배출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당시에는 부안 제1의 노적리라고 명성이 높고, 성균관과 유림단체를 비롯하여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이처럼 내 고향 노적마을에서 배출된 많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효죽기념 사업을 시작한 지 6년이 되었지만 부지 선정과 예산문제로 지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룩해야 한다. 현재 이 사업에 관심을 표명한 독지가 고영상(高永尙) 교장이 부지 150평을 희사하므로 설계와 측량을 본격적으로 추진중이다.

그리운 효죽, 옛날 효죽을 세웠던 그 자리에 효죽 기념비와 기념상징물을 세워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탐방객들에게는 알찬 관광의 기념은 물론 후세인들이 본이 되고, 존경과 추앙받는 대상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고재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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