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3) 다락방의 추억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 (33) 다락방의 추억
  • 전은희 동화작가
  • 승인 2020.11.03 16: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관찰 예능을 보면서 모 연예인이 자동차 안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는 장면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그는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노래 실력이 별로였지만 흘러나오는 모든 음악을 생목으로 열창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노래를 즐기는 모습에 나도 점점 유쾌했다.

 고등학교 친구 H도 그 연예인만큼이나 노래를 즐겼다. 단, 노래 실력은 H가 월등하게 좋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H는 작은 체구와 달리 유난히 목소리와 행동이 커서 쉽게 눈에 띄었다. 음악 시간에는 굵고 힘 있는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러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H는 어떤 노래라도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게 부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H가 목청껏 부르면 쓸쓸한 오솔길을 거니는 듯 애잔한 노래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소풍 길로 바뀌어 버렸다. 그 시절 즐겨 들었던 유재하의 노래도 H에게 걸리면 예외가 아니었다.

 

 보일 듯 말 듯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지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리워진 길’을 들으면 그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H는 밝은 성격에 항상 친구가 많았고, 나는 자신감 넘치는 H를 좋아했기에 나의 추억 속에는 늘 H가 등장한다. 친구 모두가 대학 입시와 졸업 후 진로로 불안해할 때도 H는 특유의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하지만 졸업할 즈음에 들은 H의 고백은 코끝을 찡하게 했다. H가 언제나 우렁차게 노래를 부른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H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는데, 엄마가 서울에 물건을 하러 갈 때면 혼자 있는 무서움을 견뎌내기 위해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들락거렸던 H의 다락방에서 보낸 시간이 아름다운 노랫가락처럼 감미롭기만 한데 H에게는 잊고 싶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H가 시험 기간마다 함께 모여서 공부하자고 부른 것은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H는 서울로 떠났다. 성공한 뒤에 연락하겠다며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 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그대여 힘이 돼 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찾을 수 있도록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즈음 H와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다. 나는 H가 너무나 반가웠는데 친구는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만남을 꺼렸다. 그제야 우리가 대학 진학을 고민할 때 H는 졸업 후 생계를 고민을 하였다는 게 떠올라 너무도 미안해졌다. H의 집이 있었던 한옥마을 일대를 지나칠 때마다 더더욱 그리워지곤 했다. 이십 대가 되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없을 줄 알았는데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방황할 때면 더더욱 H네 다락방이 생각났다. 그 시절 다락방이 없었더라면, 나와 친구들은 고교 시절의 불안과 초조를 이겨낼 수 있었을까? 다락방에 울려 퍼지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지난 날, 가리워진 길’ 등의 노랫가락은 나와 친구들이 불안한 20대를 이겨내는데도 커다란 힘을 주었다.

 살면서 까닭 없이 우울해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몇 번인가 유재하의 노래를 부르려고 도전한 적이 있었다. H만큼 힘차게는 아니지만 시늉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게만 해도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H가 부르는 걸걸한 노래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언제나 이맘때가 되면, 친구들과 함께 재잘거리며 몰려다니던 객사와 경기전 일대가 그리워진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H의 노래를 들으며 굴러가는 나뭇잎 한 장에도 웃고 싶다. 이제는 H 혼자서 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못 부르는 노래지만 목젖이 보이도록 함께 소리쳐 부르고 싶다.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글 = 전은희 동화작가

 

 ◆전은희

 2012년 샘터 동화부분 당선. 2017년 한국 안데르센 동화부문 대상. 장편동화 ‘열세 살의 콘서트’, ‘평범한 천재’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