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8> 차, 도은 이숭인의 자락처(自樂處)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88> 차, 도은 이숭인의 자락처(自樂處)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0.11.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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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은 이숭인 (陶隱 李崇仁, 1347~1392)은 고려 말 충목왕에서 공양왕까지 4명의 임금을 섬기며 격변기를 살아온 정치가이며 학자이다. 정몽주 문하에 있으면서 뛰어난 학문으로 그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우왕 12)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다. 하지만 난세절의라 했던가. 힘든 귀양살이에 이르고 정몽주가 처형되자 결국 동학이었던 정도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정몽주의 죽음을 조상하며 그의 절절한 심정을 드러낸 글을 보면, “도하, 세상이 이미 멀어졌으니 내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통곡의 눈물 끊이지 않도다. 단을 모아 선왕께 제사를 지내니, 저 치악산만 푸르구나. 벗은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슬프도다 정자여 돌다리 붉게 물들었으니, 저 물가에 우뢰소리 들리네.” 이렇듯 스승과 벗을 잃고 갈 곳 없는 그의 정처 없는 허망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도은의 뛰어난 문장력을 감탄한 이색(1328~1396)은 “도은의 시를 읽으니, 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는 것 같고 골짜기에서 나온 얼음을 옥 항아리에 넣어둔 것 같은 청명한 글”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숭인의 시문은 태종(1404년) 4년 왕명에 의해 권근이 편집하여 도은집을 간행하였다. 그의 차와 관련된 시중에 ‘차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표현한 화답시가 있다. “백 안렴사가 차를 보내왔기에(白廉使惠茶)”라는 시이다.

 

  선생이 내게 화전춘을 보내 주시니,

  색과 맛 그리고 향이 하나하나 모두 새롭구려.

  하늘 끝에 떠도는 나의 한을 씻어주니,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음을 알아야 할지니.

 

  불을 피워 맑은 샘물로 홀로 차를 달이니,

  청자 다완에 향이 퍼져 속된 내음 씻어주네.

  벼랑 끝에 위태로운 백만 백성의 목숨을,

  봉래산 여러 신선에게 물어 묻고 싶네.

 

  맑은 차를 홀로 마시며 차의 색과 향기와 맛이 그의 한을 씻겨 준다는 것으로 보아 선물로 보내온 차가 참으로 반가왔던 모양이다.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기록된 일화가 있다. 해학적인 일화를 기록한 글로 1권의 내용 중 삼봉 정도전과 도은 이숭인과 양촌 권근이 벌인 평생의 자락처(自樂處)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글이다. 세 사람이 모여 ‘홀로 즐길만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삼봉은 “북쪽 변방에 첫눈이 내리면 담비 갖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벽창우를 끌고 평원을 달리며 사냥하는 것, 바로 이것이 즐거움이요.”라고 한다.

  도은은 “산방의 고요한 집 밝은 창, 깨끗한 책상에서 향을 사르며 스님과 함께 차를 달이고 시를 짓는 것, 이것이 족히 즐길만한 것”이라고 한다.

  양촌은 “흰 눈이 뜰에 가득하고 아침 해는 창 가까이 솟아오르는데 따뜻한 방에 병풍을 둘러치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화로가 누워 아름다운 여인이 섬섬옥수로 수를 놓다가 때론 바느질을 멈추고 밤을 구워 먹는 것, 이것이 족히 즐길 만한 것이지요. 세상살이가 사람마다 다르듯 세 사람의 즐거움이 다르니 추구하는 바도 달랐을 것이다.

  한때 이들은 차를 선물하며 서로를 위안했던 것 같다. 차 달이고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도은은 삼봉에게 차와 안화사 샘물까지 보내며 지은 시가 있다.

 

  “삼봉 정도전에게 차 한봉지와 안화사의 샘물 한병을 보내며”

  송악산 바위틈에 굽이굽이 흐르는 샘물,

  솔뿌리 엉긴 곳에서 솟아난 것이라오.

  머리에 검은 사모 쓰고 독서하는 한낮 따분할 때면,

  돌솥에서 찻물 끓는 소리 즐겨 들으시구려.

 

  하루종일 검은 사모를 쓰고 걸상에 앉아 독서하는 정도전의 건강을 걱정한 이숭인, 그가 보낸 차와 샘물은 그들이 가는 길은 달랐지만 한때 차를 통해 마음을 열고 있었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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